청계산 수필

잠이 오지 않는다

송담(松潭) 2020. 6. 12. 04:53

잠이 오지 않는다

 

지 교 헌

 

잠이 오지 않는다. 다리도 불편하고 속도 불편하다. 참을 수가 없어서 일어나 거실을 거닐다가 물도 마시고 약도 먹는다. 시침은 밤 3시를 가리키고 있다. 발목에는 시퍼런 빛깔이 여전하다. 정강이는 당연히 통증을 일으킬 수 있지만 복숭아뼈가 묻힐 만큼 발목이 부어오르고 살갗이 푸른 것은 좀 이상하기도 하다.

 

나는 P교수가 강의하는 날,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갔다. 강의가 끝나고 모두 기념사진을 촬영하기 위하여 단상으로 모였다. 나만 굳이 빠지기가 싫어서 걸어 나갔다. 단상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왼 발을 올려놓고 오른 발을 떼는 순간 정신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아찔하였다. 그러나 나는 떨치고 일어나 사진을 찍고 P교수와 인사도 나누고 그를 배웅하였다.

 

정강이가 몹시 아팠다. 바지를 올려 보니 정강이와 내의에는 유혈이 낭자하였다. 택시는 잡을 수가 없었다. 버스를 두 번이나 타고 J병원에 이르렀으나 접수가 마감되었으니 응급실로 가란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 왔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집에서 치료하고 다시 나흘 만에 작은 외과의원을 찾아가서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여러 날 간다고 말하고 날마다 병원으로 오란다.

 

벌써 몇 년 전에는 내가 강의하러 갔다가 강사소개를 받고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원인은 의자에 작은 바퀴가 달려 있어서 미끄러졌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크게 놀란 빛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때 마음을 진정하여 강의를 진행할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정도로 넘어지는 광경을 연출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튿날 아픈 다리를 끌고 동아리 모임에 참가하고 강의도 예정대로 마치고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발목은 많이 부어 있었다.

 

사람이 늙으면 다리에 힘이 없고 중심을 잃어서 아무 때나 넘어지기 쉽다고 한다. 나도 그것을 번번이 체험하고 벌벌 떠는 기분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다리를 다치고 나서는 아침마다 욕조에 들어가 몸을 씻기가 겁이 날만큼 마음이 어려졌다. 버스를 타는 것도 겁이 난다. 옆에 누구라도 있으면 아무 때나 손을 내밀어 의지하고 싶다.

 

지나고 보니 내가 며칠 전에 넘어진 원인은 내 자신의 경거망동에 있었다. 나는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데로나 함부로 올라가다가 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건강한 사람들이야 별로 문제가 없지만 나는 그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고 함부로 발을 옮겼던 것이었다.

 

그래도 나의 무분별하고 순간적인 경거망동의 결과는 대체로 나에게서 그치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만일 어느 집단의 지도자나 국가의 원수(元首)가 어떤 일을 경솔히 판단하여 저질렀다면 결과는 간단하지 않다. 자신이 망신을 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말 한 마디가 온 나라의 논쟁이 되고 지역이나 계층에 영향을 주어 시끄러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심지어는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어서 자국의 인명이나 재산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타국의 인명이나 재산을 손상케 하고 나아가서는 집단적 안전보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많은 나라의 전쟁을 유발하는 수도 있을 수 있다. 전쟁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지은 업보(業報)에 따라 생명과 재산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어떤 폭력의 제물이 되고 마는 수도 많다. 인류역사를 보면 지도자의 역할은 너무나 중대하고 그 영향은 너무나 심각하다.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모두 지도자들의 경거망동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지도자들은 흔히 진정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이웃나라를 겁박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망상에 사로잡히거나 자기의 권력이나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웃니라를 도발하다가 결과적으로는 자국의 불행으로 끝나는 수가 허다하였다.

 

우리나라는 1945년, 조국의 해방으로 광복을 되찾게 되었고 많은 지도자들이 나타나 남북의 통일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화려한 논리를 전개하기도 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이라는 대사변이 일어나 인류역사상 가장 큰 비극의 행렬을 연출하게 되었고 그 여파는 아직도 세계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서구사회에서 정착한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한 형편이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얻지 못하고 있다. 날마다 대중매체에서 소개되는 사건들은 모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도자층에 관련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날마다 파당을 지어 서로 비난하고 매도하고 격투하기 위하여 태여 난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들은 마치 파당을 지어 남과 다투기 위하여 지도자가 된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국민에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이 경거망동하여 넘어지고 다치고 망신을 당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내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치고 병원을 드나드는 것은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타인에게는 거의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래도 전전긍긍 여리박빙(戰戰兢兢 如履薄氷)이라는 고전의 글귀를 명심하고 앞으로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하겠다.

(2018.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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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교헌(일명 지대용)

1994 <월간 수필문학>등단, 수필집 및 논저 다수

한중연 명예교수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