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는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
지교헌
탄천변(炭川邊) 산책 길 옆에는 크고 작은 나무와 어른 키보다도 높이 자란 갈대와 억새가 끝없이 우거져 있는데 거기에는 너구리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측면에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풀 섶에 숨어있는 너구리는 작은 편이었지만 사나운 모습이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하얀 애완견을 한 마리 끌고 다가 왔다. 주변에 서 있던 여인들은 소리쳤다.
“너구리가 있어요. 강아지 조심하세요!”
나는 여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였다. 사람이 여럿이 있고 주인이 끌고 가는데 감히 그 작은 너구리가 애완견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나는 다만 너구리의 행동이 궁금하기만 하여 지켜보고만 있었다. 드디어 젊은 여자가 하얀 애완견을 끌고 너구리 옆으로 다가오고 너구리는 뒷걸음을 치며 몸을 숨기는 듯하였다. 여인은 무사히 애완견을 끌고 너구리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애완견이 약 15미터쯤 지나갔을 때 너구리는 잽싸게 달려가 애완견의 엉덩이를 무는 것이었다. 애완견은 비명을 지르고 주인은 깜짝 놀라 애완견을 끌어안았다. 너구리는 계속하여 다시 달려들 기세였으나 사람의 팔에 안긴 애완견에게는 뛰어오르지 못하였다. 바로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언저리에 너구리 새끼가 네 마리나 있고 어미도 두 마리라는 것이었다. 어미는 먹이를 사냥하여 새끼들과 잔치를 벌일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판단이 너무나 현실과 어긋난 것이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바로 앞에 서 있고 아직도 날이 어둡지도 않은 상황에서 사람이 끌고 가는 애완견을 그 너구리가 감히 공격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는 달리 너구리는 사냥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일부러 몸을 뒤로 숨겼다가 안심하고 지나가게 한 다음에 뒤에서 재빨리 달려들어 공격한 것이다. 공격을 받은 애완견은 틀림없이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동물병원으로 갔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였다. 너구리에 물린 애완견은 국제무대에서 침략을 당하는 약소국(후진국; 저개발국)과 같은 처지가 아닌가 하고. 침략을 받는 약소국은 어떤 강대국이 자기를 침략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거나, 알고 있더라도 대비가 소홀하였을 것이며, 때로는 어떤 강대국의 보호를 받으며 사대주의정책(事大主義政策)을 견지하다가 뜻밖의 적에게 공격을 받은 사례도 있을 것이다.
16세기 말엽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명(明)나라를 사대하여 많은 문화적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혜택을 받으면서 일본(日本; 倭)을 ‘섬나라오랑캐’라고 멸시하였다. 그러면서 많은 관료들은 사색당쟁과 부정부패를 일삼고 왜구의 침략을 예고하는 선각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배격하였다. 이때의 조선은 믿을만한 주인에게 보호를 받으며 의기가 양양한 애완견과 흡사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믿고 섬기던 명(明)이라는 보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라는 너구리(?)에게 여지없이 꽁무니와 몸통을 물리고 말았다. 국왕은 국경선까지 몽진하고 백성은 코가 잘리고 귀가 잘리고 조총에 맞아 죽거나 날카로운 일본도(日本刀)에 목이 잘렸으며, 많은 백성이 사로잡혀 가고 문화재가 불타거나 약탈당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는 국가의 주권(主權)마저 송두리째 강탈당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륙민족과 해양도서족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왔다. 1636~37년에 있었던 병자호란에서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겨우 멸망을 면하였다. 어찌 그뿐인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남북이 분단된 후로는 이른 바 6.25사변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어 3천리 근역은 피로 물들고 정전협정 후에도 군사적 충돌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빈번한 국가적 민족적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일부의 통치자나 지도자들은 파렴치한 범죄자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둔갑하거나 커다란 실수가 궤변으로 합리화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오늘 너구리가 애완견을 공격한 사건은 여인들이 그 너구리의 공격성을 인지하고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제지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따라서 애완견이 물린 책임은 제1차적으로는 주인에게 있겠지만 제2차적으로는 사전에 경고하던 여인네들의 말을 함부로 무시하고 가로막은 나에게 있는 것이었다. -나는 피해자에게 달려가서 보상이라도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면서 남의 생각을 물리친 것이 나의 커다란 오판이요 실책이요 독단이요 교만이요 만용이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흔히 ‘실수’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실수란 ‘부주의로 잘못을 저지름’이라고 하는데 영어의 ‘mistake, error, blunder, wrong, failure’ 등과 같은 단어와 유사한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실수’라는 말에 대하여 용서될 수 있는 것, 대단치 않은 것, 누구나 저지르는 것으로 너그럽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실수도 있고 중대한 실수도 있으며 그 사소하거나 중대하다는 기준이 뚜렷한 것도 아니어서 쉽사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마치 동기를 중시하는 ‘동기론’이나 결과를 중시하는 ‘결과론’처럼 어느 한 쪽에 치우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저질은 실수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아주 작은 실수도 무수히 많았지만 커다란 실수도 많았다. 그 중에는 나에게 유형무형의 피해를 준 것도 있고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허다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각계각층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지식층과 지도층 인사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릇된 지식이나 이기심이나 배타심이나 편견이나 영웅심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위선과 허세와 과장과 기만과 궤변과 망언을 서슴지 않으며 국가와 사회의 안전과 발전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오판이나 실수의 수준을 멀리 넘어서서 철면피와 범죄의 수준에서 날뛰고 있는 모습이다.
날이면 날마다 들려오는 일부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의 망언들은 내가 저지른 실수처럼 어리석기 그지없다. ‘너구리는 결코 애완견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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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교헌>
한국문협,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월간수필문학>추천작가회, 한국경기수필가협회 회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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