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지기 (浩然之氣)에 대하여
지교헌
나는 일찍부터 ‘호연지기’라는 말을 들어 온 것 같다. 이따금 선생님들에게도 듣고 지식층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들어 왔다. 그리고 수년 전부터는 자주 드나들게 된 공공장소에서도 ‘浩然之氣’라는 훌륭한 휘호(揮毫)를 보게 되었다. 언제나 독서하기를 좋아하는 K교장의 입에서 “호연지기가 무엇인지, 강의를 듣고 싶다.”는 말이 튀어 나왔다.
그것은 나에게 던져진 말이었다. 명색이 동양철학을 전공했다는 나를 향하여 자연스럽게 던져질 수 있는 말이고, 고전적이고 철학적이어서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말이기 때문에 K교장의 말은 색다른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호연지기”가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라는 사실밖에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막연하게 ‘호연한 기운’, ‘광대하고 무변한 기운’쯤으로 이해되고, 그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차원 높은 기운이며 드높은 인격수련의 경지에 도달한 수준이라는 짐작이 어렴풋이 다가올 뿐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야 중국고전을 탐구하는 동아리모임에서 강의를 진행하다보니 이제는 어디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호연지기’를 천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맹자>>공손추장구 상(<<孟子>>公孫丑章句 上)에서는 공손추가 맹자에게 부동심(不動心)에 관하여 질문하였는데 맹자는 “…… 의지는 기의 장수요 기는 몸에 꽉 차있는 것이니 의지는 지극한 것이요 기는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그 의지를 잘 잡고도 그 기를 침노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夫志氣之帥也 氣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어서 맹자는 “의지가 한결같으면 기를 동하게 하고 기가 한결같으면 의지를 동하게 한다.”(志壹則動氣 氣壹則動志)고도 하였다.
여기서 본다면 의지[志;뜻]는 기(氣)를 거느리고 지배하는 위치에 있으며 기는 의지의 지배를 받기는 하지만 때로는 기가 의지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호(程灝; 明道)는 이에 대한 주석에서 ‘의지가 기를 지배하는 것이 아홉이라면 기가 의지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라고 하였다. 다시 공손추는 맹자의 장점에 대하여 질문하였고 맹자는 “……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르노라.”(……我善養吾浩然之氣)고 답하였다. 이어서 공손추는 무엇이 호연지기인지 다시 질문하였고 맹자는 대답하였다. “말하기 어렵도다. 그 기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정직으로써 기름에 해가 없으면 천지지간에 가득하게 된다.”(曰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고 하였다. 또 이어서 말하기를 “그 기(氣)됨이 의(義)와 도(道)로 짝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결핍하게 된다.”(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餒也)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의라는 것은 인심지재제(人心之裁制)요 도라는 것은 천리지자연(天理之自然)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천리의 자연과 인심의 재제가 서로 조화된 지대지강한 기가 곧 호연지기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맹자가 기르는 호연지기라는 것은 인간의 의(義)와 천지자연의 도(道)가 완전히 결합하여 일체를 이룬 기운의 경지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자(告子;告不害)와 같은 사람의 경우와는 다른 차원의 호연지기를 맹자는 체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자에 관련되는 논변은 생략하기로 함- 여기서 우리는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을 볼 수도 있어서 인간은 천지자연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며 마땅히 천지자연과 합일하여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인간은 천지자연의 한 구성원인 동시에 그 피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천지자연의 어떤 질서와 힘에 대하여 거역하고 독자적으로 독립하거나 분리하여 생존하기는 어렵다. 천지자연중심의 사상이나 또는 창조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중심의 사상이나 인간중심의 사상이 모두 인간의 사유에서 창출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우주라고 일컫는 범위를 벗어날 수도 없고 초월할 수도 없고 거역할 수도 없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천지자연의 원리와 섭리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는 때때로 천지자연의 섭리를 벗어나려 하고 배반하려 하고 무시해버리려는 사고와 행위를 감행하기도 한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때때로 ‘자연에 대한 도전’이나 ‘정복’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였다. 자연에 대한 도전이나 정복이라는 말은 인간의 능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천지자연의 섭리를 경시하고 거부하는 태도애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인류역사를 회고해 보면 인간은 천지자연에 순응하는 것만으로 생존이 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연재난을 비롯한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생존하는 능력을 기르고 인내해야만 하였다. 인류는 그 여러 가지 장애와 난관을 가리켜 인간에 대한 자연의 도전(挑戰;challenge)이라고 해석하고 그 도전에 대하여 응전(應戰;response)함으로써 멸망을 면하고 발전해 왔다고 믿는다. 그것은 믿을만한 사실이며 인류역사가 증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천지자연의 근본적인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진리가 엄연히 존재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멸망으로 가고 있음이 증명되고 만다. 크게 보아 인간은 자연을 거역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천지자연의 도(道)와 인간의 의(義)를 떠나 희망을 창조할 수 없으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도 없다. 맹자의 호연지기는 그의 부동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천인합일의 사상인 동시에 인본주의 사상이기도 하다.
(2017.7.19)
지교헌(일명; 지대용)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한국공무원문학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청계산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선비의 모습 (0) | 2020.05.15 |
---|---|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을 보고 (0) | 2020.01.18 |
부부가 화목하는 것 (0) | 2019.11.09 |
지도자의 자세 (0) | 2019.07.06 |
내가 본 독도(獨島) (0) | 2019.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