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독도(獨島)
지교헌
1963년쯤으로 기억된다. 충북보이스카우트연맹에 관계하고 있던 L선생은 회원들을 인솔하여 독도(獨島)엘 가겠다고 하였다. 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하면서 강의도 한 과목 맡고 있었던 나는 독도에 대한 관심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막연하나마 바다에 대한 동경(憧憬)도 있지만 이따금 일본인들이 자기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우리들 일행은 하기휴가가 시작되자마자 배낭을 짊어지고 야간열차를 이용하여 길을 떠났다. 당시는 포항에서 이틀만큼 울릉도행 여객선 청룡호(靑龍號)가 떴는데 포항에 도착하여 시간여유가 생겼다. 일행은 내연산(內延山) 주변의 사찰과 폭포를 둘러보고 나서 밤 여덟 시에 여객선을 탔다. 바다는 어둡기만 하고 육지의 불빛은 점점 멀어져 갔다. 시간은 흘러서 새벽이 왔다.
바다를 뒤덮은 엷은 안개 속에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울릉도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났다. 울릉도는 한자(漢字)로 ‘울릉도’(鬱陵島)라고 쓰지만 ‘우릉도’(羽陵島)라고도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커다란 독수리나 두루미의 날개를 연상하는 능선이 거의 수직으로 수없이 드리워져서 웅장하고 둥근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미리 울릉군수를 겸직하고 있는 울릉경찰서장 앞으로 독도를 수비하는 경찰관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독도를 방문하고자하니 경비정에 편승하게 해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하다는 회신을 받았던 처지였다. 도동항(道洞港)에 도착한 우리는 마침 이틀 동안의 여유가 생겨서 울릉도의 북단에 있는 천부동(天府洞)을 거쳐서 섬을 일주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독도로 향할 준비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천부동은 바다 가운데 돌기둥이 솟아 있고 은빛 모래가 깔린 백사장도 보기드믄 절경이었다.
우리는 이틀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경비정에 편승할 수가 있었다. 경비대원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위문품을 가지고 이른 바 만경창파에 몸을 맡겼다. 배는 잘도 달렸다. 그러나 울릉도에서 멀어질수록 파도는 이상한 모양으로 변하고 있었다. 동해안이나 서해안이나 제주항로에서 바라보던 파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파도가 아니라 커다란 물결의 구릉(丘陵)들이 모인 특이한 모습이었다. 이따금 보이는 어선들이 완전히 물속으로 잠겼다가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면 흔히 보는 파도[波濤; wave]가 아니라 융기(隆起; swell)의 현상이었다. 배는 점점 롤링(rolling)을 시작하더니 핏칭(pitching)을 겸하여 연출하였다. 전후로 좌우로 심하게 요동을 쳤다.
나는 점점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나기 시작하였다.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고 ‘장갑차’라는 별명을 가진 L선생도 구역질을 시작하였다. 아무리 참으려고 하여도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두어 시간이나 만경창파를 넘고 넘은 끝에 드디어 독도의 모습이 제대로 나타났다.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로 나뉘어 있고 갈매기가 무리지어 날기도 하고 바위에 모여서 지저귀고 있었다. 동도에 주둔하고 있는 경비대원들은 빗물을 저장하여 쓰기도 하고 서도에 있는 담수(淡水)를 가져다가 식수로 사용한다고 한다. 나무라고는 전혀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다만 약간의 풀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
동도와 서도를 이어주는 바위들은 자연스럽게 한 폭의 예술을 연출하였다. 그 형언할 수 없는 모양이나 빛깔이나 모두가 신비하기만 하였다. 동도는 좀 더 높고 화산의 분화구로 상하가 관통하고 있음을 알았다. 지하에는 값으로 따지기 어려운 신기한 광물자원이 매장되고 수중에는 수많은 동물과 어패류가 평화롭게 서식하고 있는 선경(仙境)이었다.
그런데 저 아름답고 신비한 독도를 일본인들이 감히 자기네의 땅이라고 주장한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은 이미 신라(新羅)시대부터 인정되어 온 것인데 일본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시아의 평화를 교란하기 시작한 19세기 말엽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람들은 ‘돌’을 ‘독’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독도’는 ‘돌섬’[石島]과 같은 뜻이고 한자로는 ‘獨島’로 기록된 것으로 안다. ‘독도’는 ‘돌섬’인 동시에 ‘홀로 있는 섬’이니 동해의 한 가운데 속하는 해중에 홀로 있어서 글자의 뜻과 부합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돌’과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1952.1.18.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대한민국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평화선; Rhee Line]은 수많은 역사적 문헌과 학자들의 연구와 국제적 선례에 따른 국제법적 근거에 따라 선포한 정당성을 완전히 갖춘 선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무가내하로 근거도 없이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부르면서 일본의 시마네현(島根縣)에 종속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독도를 가리키면서 일본인들이 ‘대나무’를 생각한 것은 어떤 환상(幻像)을 끌어댄 것이며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근거 없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국제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하나의 망발이라는 것을 모를 까닭이 없겠지만 그들은 독도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천부적 이성(天賦的 理性)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역사적 사실과도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 전근대적 제국주의의 망령(亡靈)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가 포함되는 우리의 영해(領海)가 공동수역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1994년 11월, 유엔해양법협약의 발효가 중요한 발단이 되어 1997년을 거쳐 2005년과 2006년을 거치는 동안에 거의 공인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독도가 분명한 한국의 영토이니만큼 유엔해양법협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독도의 영유권에 관한 역사적·법학적 연구의 전문가는 국내에 많이 생존해 있고 그 정당성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한일어업협정’은 말할 필요도 없고 나아가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경비정에서 경비대원들이 독도에 상륙하고 독도에서 근무하던 대원들이 경비정으로 옮겨 타는 데는 작은 전마선을 이용하는 형편이어서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 시절은 오늘날과 같은 선착장 시설이 전혀 없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경비대원들의 교체에 협력하고 우리의 상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경비정에서 손을 흔들고 환호하면서 ‘대한민국만세’를 부르고, ‘韓國嶺’(한국령)이라는 세 글자를 응시하면서 동도를 한 바퀴 돌고 경비초소를 바라보며 귀로에 오르게 되었다. 상륙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오히려 독도의 신성(神聖)을 위하여 좋은 일이기도 하였다.
6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독도의 그 엄숙한 모습과 물결과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나의 뇌리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결코 한일공동어로수역에 포함될 수도 없는 대한민국의 배타적 수역의 주권이 행사되어야 한다. 독도는 영원한 우리의 영토이다. (2019.5.15.)
'청계산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부가 화목하는 것 (0) | 2019.11.09 |
---|---|
지도자의 자세 (0) | 2019.07.06 |
사효당(思孝堂) (0) | 2019.05.26 |
황혼연설(?) (0) | 2019.03.31 |
몽골 ‘낙타털양말’ (0) | 2019.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