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낙타털양말’
지교헌
한국과 몽골은 경제교류가 있는 것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몽골에서 생산한 제품을 사용하거나 소유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몽골에서 생산된 양말을 신게 된 것이다. 제법 툭툭하고 부드럽고 탐스럽게 보이는 갈색 양말이다. 흔히 ‘낙타털양말’이라고 부른단다. 어려서부터 목면양말이나 화학섬유양말을 주로 신다가 낙타털양말을 신어 보니 매우 푹신하고 발이 편하다. 양말에는 ‘MADE IN MGL … 40-42'라는 글씨가 보였다.
낙타털양말은 지난 12월에 한 제자가 가져다 준 것이다. 제자는 1970년대에 내가 근무하던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교육계에 봉직하다가 정년퇴직하고 지금은 훌륭한 배우자와 노후를 즐기는 처지였다. 그리고 수개월 전부터는 내가 동양고전을 강의하고 있는 동아리모임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는 숙녀이고 모범적인 학생(?)이다. 대학에서 나와 가까이 지내던 제자들이 있긴 하였지만 40-50년이나 흘러간 지금 내가 제자들의 이름이나 인상을 기억하는 학생은 드물고 더군다나 다시 강의실에서 만난 제자는 없었던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 나에게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학생이 있었다. 나도 중국어를 전공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공부한 형편이었지만 교재를 읽어가며 함께 공부한 일이 있었는데 나에게 양말을 선사한 제자는 직장생활을 통하여 서로 잘 알고 있었단다. 지금도 중국어를 많이 공부하여 상당한 수준에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으니 ‘청출어람벽어람’(靑出於藍碧於藍)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대학에서 ‘한국사회의 제문제’와 ‘국민윤리’를 주로 강의하고 방송통신대학의 협력대학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철학개론’과 ‘윤리학개론’을 강의하였고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웅변반과 산악반과 태권도반의 지도교수를 차례로 맡기도 하였었다.
내가 웅변반지도교수가 된 것은 문교부 주최 전국남녀학생웅변대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공문이 내려오자 총장님은 특별히 나를 불러 대책을 의논하였다. 내가 고교시절에 웅변대회에 출전한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즉시 공문내용을 게시판에 공고하여 대회 출전 희망자를 모으고 그 가운데 J양을 지명하여 약 3주일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지도하였다. 학생이 써온 원고는 폐기하고 내가 다시 써서 완전히 암기하게 하였다. 주제는 ‘국적 있는 교육’이었다. 대회 전날 나는 출전자 외에 4-5명의 학생들을 인솔하여 고속버스로 서울의 광화문에 있는 대회장에 도착하여 현장에서 연습을 시키고 나서 인근의 여관에서 숙박하고 대회에 참가하였다. 전국에서 초․중등과 대학의 연사들이 20여명이나 출전하였다. 강평을 맡은 H선생은 J양에 대하여 무엇 하나 지적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J양은 최고상을 받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서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총장님께 전화로 보고하였다. 매우 기뻐하셨다. 당시 웅변반원이었던 학생들은 졸업 후에 웅변지도교사가 되고 웅변학원 강사가 되어 활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태권도반에는 필요한 시설을 주선해주고, 산악반에는 기본 장비를 마련하여 1년에 10회 정도로 산행을 하였는데 가까운 속리산과 계룡산을 자주 가고 멀리는 지리산을 등반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농촌근로봉사활동에 참여하고, K교수가 지도하는 기러기회에 자주 초대를 받아 토론에 참여하였다.
나는 정든 교육대학교를 떠나 한중연한국학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청주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학생들의 이름도 거의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벌써 미수(米壽)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도 모두 노후생활로 들었을 것이다. 개중에는 성공한 제자들이 많고 해외로 이민을 간 제자도 더러 있다. 소식은 끊겼지만 항상 그리울 때가 많다.
이제와 생각하니 뉘우쳐지는 일도 있다. 나는 제자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였던 것이다. 농촌근로봉사활동 중에 주민에게 약주를 얻어 마시고 숙소로 돌아 온 학생을 너무 심하게 질책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음주행위는 주민에게 봉사하는 정신이 크게 손상되는 것으로 보았다. 산악반 행사에서도 음주는 엄격히 통제하였다. 술병이 발각되기만 하면 여지없이 폐기해버렸다. 그것은 내가 일찍이 범하였던 실수에 대한 자책이기도 하였다. 내가 음주로 범하였던 실수를 제자들이 다시 범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보인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감화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인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비교육적인 행태를 보인 것이었다. 나는 원만한 교육자가 되고 존경 받는 교육자가 되기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낙타털양말을 통하여 제자들의 얼굴을 그려보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제라도 낙타털양말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인품을 지니고 싶다. (2017.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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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문학>추천완료(1994) 한국수필문학가협회 회원
경기한국수필가협, 한국문협,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동양철학과 한국사상> 외 논저 및 수필집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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