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Pieta)
지 교 헌
성남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사진전시회에서 ‘피에타’라는 작품을 보게 되었다.
‘피에타’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한 후에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시체를 안고 비탄에 젖어 있는 모습을 소재로 한 그림이나 조각상(彫刻像)을 가리킨다. 본디 ‘pieta'라는 말은 이태리어로 ’슬픔’ ‘비탄’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이므로 마리아의 슬픔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함께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피에타의 원형은 13세기 독일에서 만들어진 목조각품(木彫刻品)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여러 나라에 비슷한 조각상과 그림이 전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도 가장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1475~1564)가 1496년부터 1499년까지 수년에 걸쳐 제작하였다는 높이 175cm의 대리석 작품이며, 이 작품은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San Pietro Basilica:성 베드로성당) 입구에 세워져 있다.
작품에서 보면 예수의 몸은 작은 편이고 마리아의 치마는 넓은 편이다. 실지로는 예수의 체격이 훨씬 더 크겠지만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을 표현하고, 어머니의 커다란 치마폭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현실적 위협으로부터도 보호를 받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현재 피에타는 많은 예술가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오늘 사진전에서 본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작품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작품설명에는 권오상이라는 작가의 이름과 함께 120cm x 174cm x 83cm, ‘C-Print, mixed media'라고 씌어 있었으며 여러 조각의 사진을 발라서 만든 조각상이었다(작가는 이를 deodorant type이라고 부름). 그리고 놀라운 것은 숨을 거둔 예수에 해당하는 인물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죽은 예수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란 말인가?
작품을 보면서 또 다시 놀란 것은 죽은 사람이나 그를 안고 서 있는 사람이나 얼굴모습이 똑 같은, 완전한 동일인(同一人)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여자쌍둥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쌍둥이는 아니란다. 그렇다면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나는 해설자의 간단한 귀띔을 듣고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 어떤 인간도 가족, 사회, 공동체를 벗어나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긍정적인 자아실현(自我實現)도 결국 사회 안에서 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분명히 맞는 말이다. 복잡한 도시를 피하여 깊은 산속이나 외딴 섬으로 들어가도 사회를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며, 완전히 사회와 인연을 끊어버리고 자아를 실현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자아실현이 아무리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나’와 ‘사회’가 완전히 일체가 된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기만의 세계가 존재한다. 몸과 마음이 즐거울 때도 있지만, 괴롭거나 슬프거나 외로울 때도 많다. 그런데 내가 즐거운 것을 남이 어찌 나처럼 즐거워할 수 있으며, 내가 괴롭고 슬프고 외로운 것을 남이 어찌 나처럼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할 수 있으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특수한 공동체에서 일체감을 느끼기도 하고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를 떠 안아줄 수는 없지 않은가.
엄격히 말자면 나의 즐거움이나 나의 슬픔은 마침내 나의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인척이 있고 이웃이 있어도 그들이 곧 나일 수는 없고 내가 그들일 수도 없다. 나는 나일뿐이고 그들은 그들일 뿐이다. 그러니 나의 주인공은 나이고 나의 기쁨이나 슬픔은 내가 떠안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나는 단독자(單獨者: 個別者)일뿐이다. 가정에, 사회에, 공동체에 의지함도 ‘나’라는 단독자의 의지와 결단에 달린 것이다. 하물며 절대자 앞에서랴. ‘나’는 절대자 앞에 오직 나 홀로 서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나의 죽음을 비탄할 자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주체성이나 자유나 불안이나 책임이나 모두 나에게 있는 나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나의 죽음이나 운명을 내가 스스로 끌어안고 스스로 비탄에 젖지 않을 수 없고 절대자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실존(existence)이다.
이리하여 작가는 굳이 죽은 예수와 그를 끌어안고 애통하는 마리아를 등장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남자냐 여자냐를 따질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이고, 나의 주체는 나일뿐이니까. 누가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로 걸어가고 슬퍼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나밖에 없다는 인간의 주체성을 작가는 신랄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세계 속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201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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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교헌(池敎憲. 필명: 池大庸)
성균관대대학원 동양철학과 문학석사 및 철학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교수, 명예교수
한국문협,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동양철학과 한국사상> 민속원 (1995) 외 논저 다수
<월간수필문학> 및 <창조문학> 수필등단 (1994)
<지구문학> 소설등단 (2003)
장편연작소설 <맹교수의 사랑방 이야기> 한누리미디어 (2009)
장편소설 <질풍 속에 피는 꽃> 한누리미디어 (2010)
동촌지교헌수필집7 <그들의 인생철학> 한누리미디어 (2012) 외 6권
출처 : http://blog.daum.net/d424902f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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