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수필

스승이란 무엇인가

송담(松潭) 2018. 5. 15. 05:23

 

스승이란 무엇인가

-다시 스승의 날을 보내며-

 

지교헌

 

 올해도 스승의 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스승님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성장하였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내가 어렸을 때도 간혹 학교에 가질 못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일이고 누구나 하교가 아니면 서당(書堂)엘 다니며 스승의 훈도(薰陶)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돌이켜보면 시골의 강습소에서 한국어(조선어)와 일본어를 배우고 나서 초등학교·중등하교·대학교·대학원을 거치는 동안에 수많은 학급담임선생님과 교과담임교사와 지도교수 밑에서 보고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 학교와 전공과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존경할만한 스승님들이 많았다. 그러나 초등학교와 중등하교 시절에는 체벌이나 부실수업이 잦았고 대학시절에는 교과서의 절반도 못 읽은 채 학점을 따는 수가 많았다. 당시에 빚어진 교육의 부실(不實)은 대체로 일제강점과 광복 후의 혼란과 6·25전쟁에 말미암은 것으로 보였다.

 

 내 나이 벌써 졸수(卒壽)를 바라보며 묵묵히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나도 스승님들과 거의 비슷한 정도로 교육기관에서 일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많은 스승님들 가운데 어느 분에게 가장 높은 존경심을 가지고 감화를 받았는지 어림해 본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교육자라는 직업도 인격이나 전공이나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지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불언이화교지신(不言而化敎之神) 솔선수범교지본(率先垂範敎之本) 억이양지유액이교지도지권변야(抑而揚之誘掖而敎之導之權變也)’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불언이화는 말하지 않고도 감화로 목적을 달성하는 참으로 어려운 최고의 경지이며, ‘솔선수범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꾸짖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는 방법을 쓰게 되는데 이것은 교육의 권변이라는 것이다. 상도(常道)와 권도(權道)의 논리이다. 흔히 사람들은 권도를 택하기 쉽지만 자칫하면 상도의 근본을 해치는 폐단이 나타나기도 한다.

 

 스승의 날을 생각하다가 문득 한 유(韓 愈; 768-824)사설’(師說)을 다시 읽어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이 필요한데 나보다 먼저 나서 도()를 먼저 들은 사람이라면 내가 그를 스승으로 삼고, 나보다 뒤에 난 사람이라도 도를 들은 것이 나보다 먼저라면 내가 그를 좇아 스승으로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나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도를 체득하였는지 아니하였는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비슷하거나 벼슬이 낮은 사람에게 배우려하면 그것을 비웃고, 벼슬이 높은 사람에게 배우면 그에게 아부한다고 흉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진정한 사도(師道)가 전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한 유가 말하는 스승이란 마치 공자(孔子; BC551-BC479)가 장홍(萇弘)이나 노담(老聃)이나 담자(郯子)나 사양(師襄)과 같은 사람에게 업()을 묻고 예()를 묻고 관명(官名)을 묻고 거문고를 배운 것처럼 무엇이든지 나보다 잘 알고 도를 깨우친 사람은 모두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를 말한 공자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다. 세 사람이 길을 가거나 일을 하거나 반드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따라 배울 것이요, 실수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단점을 고칠 것이니, 다시 말하면 나보다 훌륭한 사람도 나의 스승이요 나보다 못한 사람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남이 나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남을 보고 본받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가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 자신을 위하여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이나 사회나 인류를 위하여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교육은 인류문명사와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있고, 현대의 모든 국가에서는 막대한 재정(財政)을 투입하여 공교육(公敎育)을 실시하고 있으며 학부모는 사교육으로 많은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이 보편화하면 할수록 훌륭한 스승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 모든 국가의 국민에 대한 교육은 그 나라의 모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은 전통적인 학교교육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러 가지 형태의 교육기관을 마련하고 일반 국민의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의 방송통신대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서는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들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나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전문가로 활약한 사람들도 다시 새로운 전공을 선택하여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따라서 국민이 교육의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현대사회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많이 변화하였고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교육과 매우 긴요한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가 변화하고 교육이 변화한 오늘날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무한히 변화할 새로운 시대에 사는 교육자들은 어떻게 현실과 미래에 대처할 것인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것은 당장 현직에서 복무하고 있는 교육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제도권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도 무관하지 않다.

 

 정년으로 퇴직한 후에도 계속하여 지역사회의 교육·문화에 관계해 왔으며 현재도 동아리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나로서는 교육에 대한 관심을 버릴 수 없다. 과연 한 유가 말한 전도 수업 해혹’(傳道 授業 解惑)은 어떻게 이해되고, 현재의 교육이나 미래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수많은 질문들이 나에게 던져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은 역시 스승이란 무엇인가라는 기초적인 질문이다. 중국의 첸무(錢穆;1895-1990)는 경사(經師)와 인사(人師)를 역설하지 않았던가. 참된 스승은 읽고 쓰기와 같은 기능을 가르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를 전하고 미혹(迷惑)됨을 풀어주는 수준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2018.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