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손초(萬孫草) 도둑질한 이야기
지교헌
도둑질(?)을 해 본 경험은 너무 오래 되어 정확히 기억하기가 쉽지 않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을 함부로 털어 놓기는 너무나 창피하여 그저 소인(小人)답게 잊어버린 척하고 덮어 두는 것이 편할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나는 백발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생각지 않았던 또 하나의 도둑질을 저지르게 되어 은근히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방아다리 네거리 상가에 있는 인테리어 가게 앞을 지나면서 우연히도 다육식물(多肉植物)로 보이는 낯선 식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널찍한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그 식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가 이튿날 다시 그 곳을 찾아갔다. 사무실에는 여직원이 혼자서 근무하고 나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문을 두들겼다. 여직원이 눈을 돌렸다.
“실례합니다. 여기 화분에 있는 식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여직원은 하던 일을 멈추고 쫓아와서 말하였다.
“실은 저도 이름을 모릅니다.”
가만히 보니 화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옆에 두어 자나 돌로 쌓아올린 화단에도 같은 식물이 아주 탐스럽게 많이 자라고 있었다. 여직원의 눈은 화분에 있지 않고 화단에 가 있었다.
“참, 신기하네요. 이름을 알았으면 좋겠는데….”
“…….”
나는 그 식물의 작은 새끼를 한 개라도 얻어다가 길러보고 싶다고 여직원에게 말하였더니 아주 작은 것 두 개를 뽑아 주었다. 나는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새하얀 화분에 심어놓고 틈만 있으면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놈(?)이 신기하게 보이는 것은 그 번식방법이었다. 보통 식물들은 대체로 뿌리나 줄기나 씨앗으로 번식하는데 반하여 이놈은 이파리 가장자리가 동글동글하게 굴곡을 이루고 거기에 다시 작은 개체(個體)가 생겨서 뿌리가 나고 땅으로 떨어져서 자라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테리어 가게 옆에 있는 부동산 사무실에서도 확인되었다. 너무나 신기한 사실이라 나도 모르게 흥분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난 뒤 나는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L교수를 만나게 되어 운중천을 거닐게 되었다. L교수는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하였고 퇴임한 후로는 주로 고전문학 강사와 수필가로 활약하고 있는데 특히 식물학에는 전문가의 수준에 육박하고 있어서 유명 월간지에 화훼류(花卉類)에 관한 수필을 특집으로 연재하는 중이었다. 나는 인테리어 가게로 그를 안내하고 다짜고짜로 그 식물을 소개하였다. 그도 처음 보는 식물이라고 하며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한참동안을 관찰하던 끝에 사무실을 두드렸다. 마침 주말이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L교수는 카메라를 꺼내더니 여러 차례 셔터를 눌렀다. 역시 전문가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 시간에 그 놈을 얻어가지 못하면 다시 언제 기회가 올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무실 직원만 있으면 작은 놈 한두 개를 구걸하기는 무난할 것인데 낭패였다. 우리들 두 사람은 계속하여 그 놈들을 신기한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들뜬 마음을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L교수님은 이놈이 꼭 필요할 텐데 어쩌지요. 주인이 없어서?”
“……?”
나는 그에게 두어 개쯤 뽑아다가 잘 길러서 관찰하고 글도 쓰고 주인에게 식물이름도 가르쳐주면 좋겠다고 충동질을 하였다. 그러자 효과는 즉시 나타나고 말았다. 그가 손을 대자마자 나도 따라서 번개같이 손을 대었다. 겁 없이 도둑질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와 나는 공범(共犯)이고 나는 도둑질을 선동하였으니 만일 절도혐의로 논죄한다면 내가 더 중벌에 해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도둑질을 자백하더라도 주인이 과연 형사사건으로 고발할 것인지, 아니면 민사사건으로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할 것인지 잘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놈들을 화분에 심고 날마다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먼저 얻어 온 놈 하나는 병이 나서 흉한 꼴이 되었으나 다른 하나는 잎사귀 가장자리에 동글동글한 작은 개체가 맺히고 있었다. 과연 그놈들이 땅으로 떨어져 독립하여 하나의 개체를 이룰 것인지 궁금하였다. 나는 날마다 눈이 빠지게 쳐다보고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날마다 그 놈들 때문에 애가 탄다. 빨리 손바닥만큼 자라서 그 독특한 번식의 신비한 연출(演出)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 작은 것들을 수 십 번이나 들여다보다가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인테리어 가게 앞으로 가보니 남자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 나에게 코딱지만 한 것을 한 개 뽑아 주던 바로 그 친구였다. 문득 도둑질한 생각이 났지만 자백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마구 사진을 찍었다. L교수가 하던 방식이었다. 사진이라도 몇 장 인터넷에 올려놓고 많은 네티즌들에게 그놈의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호소할 작정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에 나는 인터넷 검색창을 열고 살펴보다가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클로운(clone)이라는 개념을 파악하게 되었다. 영양생식(榮養生殖, 또는 無性生殖)에 의하여 모체에서 분리되어 번식하는 식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려 있는 식물은 줄기가 곧게 벋어 올랐고 그 잎에서 클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식물의 공식적인 명칭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한 주일 두 주일, 시간은 흘렀다. 아무튼 나와 L교수는 하루속히 인테리어 가게 주인에게 우리들의 도둑질을 자백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쯤이 될까? 바로 그놈들, 장물(臟物)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게 되는 날이 될 것이다.
나는 몇 주일이 지난 후에 그 식물을 ‘천수초’(千手草) 또는 ‘만수초’(萬手草)로 짐작하고 L교수에게도 전자우편을 띄웠다. 그리고 다시 몇 주일이 지난 바로 오늘 L교수는 결정적이고 상세한 정보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놈의 이름은 ‘만손초’(萬孫草)라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종합하여 알고 보니 ‘화호접’ ‘선녀무’ 또는 ‘악어선인장’ 이라고도 부르는 이 식물은 돌나물과(꿩의 비름과)에 속하며 마다카스카르가 원산지라고 한다. 독일어 학명의 하나는 ‘Kalanchoe daigremontiana’이고, 다른 하나는 ‘Kalanchoe pinnata'이며, 영어명칭은 ‘Mother of thousands’ 또는 ‘Devil's Backbone'이라는 윤곽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직도 확신은 서지 않고 의문은 남아 있다. ’만손초‘와 ’천손초‘의 개념이 뒤섞인 것만 같다.
그런데 이놈은 생식방법이 특이하다는 점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 꽃도 매우 탐스럽고 화려하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나의 집 발코니에서 그 화려한 꽃을 맞이하기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정중하고 끈기 있게 기다리는 중이다.
이제 인테리어 가게의 주인을 찾아가 도둑질한 사실을 자수(自首)할 날이 닥쳐온 셈이다.
(2015.3.23)
만손초의 줄기가 1M나 자라 올랐다.
수십 개의 꽃이 피었으나 겨울의 혹한에 모두 얼고 시들었다.
그러나 그 꽃들이 핀 자리에서 다시 clone(새 싹)이 생기어 실뿌리가 드리워지고 있다.
만손초의 생식력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mother of thousand"라는 이름이 우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2018. 5. 6
<월간수필문학>추천완료.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회원
한국문협,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동양사상과 한국사상>외 논저 및 수필집 다수
성균관대대학원 문학석사 및 철학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청계산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의 기쁨과 슬픔 (0) | 2018.05.23 |
---|---|
스승이란 무엇인가 (0) | 2018.05.15 |
‘수필’에 대한 나의 인식 (0) | 2018.04.10 |
東村 池敎憲博士 華甲記念論文選集 (0) | 2017.12.12 |
세심(洗心) (0) | 2017.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