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 대한 나의 인식
지 교 헌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수필’이라는 말을 들어 왔다. 국어교과서에는 어김없이 이름난 문인들의 수필이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국어 시간이 즐거웠다. 선생님들의 수업(강의)은 나의 비좁은 경험과 사유의 세계를 넓혀주는 값진 가르침이었다. 나는 마치 해면(海綿)처럼 선생님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흘리지 않고 빨아들였다. 나는 수필에 속하는 여러 가지 글뿐만 아니라 운문을 포함하는 다양한 글도 읽게 되었다.
나는 점점 성장하면서 나도 모르게 수필을 쓰고 싶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싶은 것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형식에 맞추어 써내려 가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승전결의 구조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독서와 연구와 사색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는 원리를 내면화(內面化)해야하는 것이었다. 좀처럼 읽기 어려운 고전(古典)을 가지고 씨름해야 하고 외국어도 많이 공부하고 사전도 많이 들추어야 했다. 내가 좀 더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연찬(硏鑽)이 부족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까닭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나는 그 동안 전공분야와는 관계없이 몇 권의 수필집과 소설을 출판하고 아직 몇 권 분량의 원고가 남아 있다. 내가 수필로 만족하지 않고 소설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나의 창작에 마음대로 허구(虛構, fiction)를 도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감히 수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은 벌써 오래 전부터 ‘수필’에 대한 여러 가지 형태의 논의가 널리 제기되고 나아가서는 중요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수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냐? 아니냐?’ 의 문제인 것 같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국의 수필문학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저명한 학자들이나 수필을 지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고 주장해 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수필’이라는 말 자체가 한자(漢字)로 표기할 때 ‘隨筆’(수필)이라고 표기하는 것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 낱말을 얼핏 보면 ‘붓을 따른다.’ ‘붓 가는대로 쓴다.’는 뜻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별로 무리가 없는 수준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지금까지 널리 사용하고 있는 ‘수필’이라는 낱말은 중국 남송 시대의 대학자 홍매(洪邁 1123-1202)의 저서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용재수필>은 무려 5부작, 74권, 1,229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거의 40년에 걸쳐 역사․문학․철학․정치와 같은 여러 분야에서 고증(考證)과 평론(評論)을 엮은 학술서적이며 방대한 문집(文集)이다.
홍매는 그 1부작의 서문에서 ‘… 意之所之 隨卽記錄 因其先後 無復詮次 故目之曰 隨筆’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 생각이 미치는 대로 형편에 따라 기록하였을 뿐이며, 그 선후관계에 따라 사리에 입각한 분류나 체계적 평가도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수필이라고 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홍매가 말한 ‘수필’은 하나하나의 작품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고 1,229편이나 되는 방대한 문집을 하나로 본 포괄적 명칭임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여기서 홍매가 사용한 ‘수필’이라는 말이 그 동안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오해되고 왜곡되어 왔으며, 또한 아직도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문인협회(사단법인)에서 주최한 학술회의에서도 다루어져서 <월간문학>에서도 그 논문의 전문(全文)에 대한 토론과 비판이 공개된 바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것은 -다시 거듭하여 말하지만- 홍매가 말한 ‘수필’의 개념은 ‘논리적 체계나 학문적 체계가 갖추어지지 못한 문집’의 특성을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창작된 수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깨달을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의 문학계를 이끌어가는 많은 문인과 학자와 지도자들이 ‘붓 가는 대로’에 집착하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방관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론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붓 가는 대로’라는 주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수필을 너무 안이한 글쓰기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창작을 기초로 하는 문학적 가치와는 관계가 적은 단순한 ‘신변잡기’(miscellany)로 추락하게 하는 역기능적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양에서 비롯된 에세이(essay, 중수필)의 가치나 비중이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저급한 작품을 한국의 수필로 널리 인식하게 하여 수필의 진정한 문학성을 크게 위협한다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에서 철학을 공부한 L교수님의 지시에 따라 원효(元曉 617-686)의 사상에 관한 저서를 읽고 에세이를 제출한 경험이 있다. 구미 각국에서 대학생들이 교수에게 제출하는 리서치 페이퍼(research paper)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교수들은 필요에 따라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요구한다. 그 에세이는 결코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 아니며 신변잡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수필’이라고 말하면 현대문학의 수준을 갖춘 학문적․문학적․창작적 수준의 글을 가리켜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에게 아무런 감동이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수필가들의 고귀한 문학정신을 일깨우지 못하고 ‘신변잡기’의 홍수를 일으키며, 상업적 신인상(新人賞)을 양산한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렵다. 수필이 하나의 진정한 문학이라면 인간과 사회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진선미를 추구하며 대중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수필은 그저 ‘붓 가는대로’ 쓰는 작품이 아니다. (* 이 글은 <토론>:창작문예수필-작품과 작법23 특별호를 많이 참작하였음.)
(2016.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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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지교헌
<월간수필문학>추천완료.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회원
한국문협,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동양사상과 한국사상>외 논저 및 수필집 다수
성균관대대학원 문학석사 및 철학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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