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선비의 모습
‘선비’라는 낱말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직업적 구별이 분명하였던 전근대적 전통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던 말이고 현대와 같은 산업사회에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낱말이다.
그러나 요즘도 사람들은 이따금 존경할만한 사람을 가리켜 ‘선비’라고 높이는가하면 이와는 반대로 경멸할만한 사람을 가리켜 ‘무식쟁이’니 ‘사기꾼’이니 심지어는 ‘쌍놈’이라는 말로 폄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선비’라는 낱말은 학식이나 인격이나 행동이 매우 이상적이어서 남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낱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현대사회의 시민들은 사농공상의 차이를 거의 가리지 않고 자신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 가정과 국가사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한다. 따라서 어느 직업이 특별히 귀하거나 천하다는 관념은 거의 떨쳐버리고 최선을 다하여 자아실현을 성취하는 것이 중요한 가치관이 되고 한 생애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선비답기’를 바란다. 모든 일에 공정하고 봉사적이며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지 말 것이며 직무수행에 최선을 다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간혹 실수할 수는 있을지언정 고의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교만하거나 함부로 선동적인 말을 쓰거나 범법행위를 저지르지는 않기를 기대한다.
정치인을 포함하는 공직자는 관계법령에 따라 성실의 의무, 복종의 의무, 친절의 의무, 비밀엄수의 의무, 청렴의 의무, 품위유지의 의무 등이 부과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직자들은 성실의 의무나 청렴의 의무는 고사하고 부당한 특권이나 누리려 하고 일반 시민들이 생계를 위하여 순간적으로 저지르는 파렴치한 범죄를 스스로 저지르고도 국가의 공권력에 저항하거나 거짓말하기를 밥 먹듯 하는 철면피한 꼴을 너무나 자주 보여 주고 있음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하여 한국사회에서는 공직자나 정치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적 평가가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듣기가 몹시 민망할 뿐만 아니라 좌절감마저 느낄 때도 많다.
인류문화의 정신적 지주를 이루고 있는 동서고금의 모든 경전(經典)은 사람의 도덕적 윤리적 생활규범과 인격에 관하여, 다시 말하면 기본적인 인간상(人間像)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유가(儒家)의 경전에서는 그 기본적인 인간상을 선비[士]로 표현하기도 한다.
<논어>(論語) ‘자로편’(子路篇)에는 자공(子貢)과 공자(孔子)가 선비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의 내용이 보인다. 자공은 어떠한 사람을 선비라고 일컬을 수 있는지 공자에게 몇 차례나 거듭하여 질문하였고 공자는 대략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첫째로 선비는 스스로 행동하는 데 부끄러워함이 있고 사방(四方)에 사신(使臣)으로 다니면서도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 사람이며, 둘째로는 그의 종족(宗族)이 효성스럽다고 칭송하고 지역사회[鄕黨]에서는 공순하다고 칭송하는 사람이며, 셋째로는 비록 식견이 천박한 소인일지라도 말[言]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으며 행위에는 반드시 실천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여 만일 잘못이 있을 때에는 부끄러워할 줄을 알아야하고, 자기의 잘못이 통치자의 기대나 명령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집안과 일가친척과 마을에서는 효성스럽고 공순(겸손)해야 하며, 다소간 옹색하기는 하더라도 언행(言行)에는 신의가 있는 사람이라야 선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노(魯)나라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대부(大夫)들은 어떠하냐고 다시 자공이 물었다. 이에 대하여 공자는, 녹봉이나 가지고 많으니 적으니 따지는 좀스런 안간들[斗筲之人]은 선비라고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의 대부들을 선비다운 선비라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다시 중행(中行)을 얻지 못하여 더불어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광자(狂者)와 견자(狷者)가 낫다고 하였다. 광자는 뜻이 지극하여 나아가 취하는 바가 있고 견자는 아무 일이나 함부로 행하지 않고 절제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견해로는 중도(中道)를 실천하는 훌륭한 선비가 이상적이지만 그런 훌륭한 선비를 얻기 어려우면 차라리 뜻이 매우 높거나 아니면 지식이 다소 부족한 광자나 견자라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광자와 견자는 비록 중도를 행하기는 쉽지 않지만 선비에 매우 가까운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공자가 살던 시대와는 너무나 다른 물질문명을 창조하고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직자사회에는 공자가 말한 수준의 선비다운 인물이 얼마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날이면 날마다 공직자의 경거망동과 비리와 범죄가 대중매체의 기사로 등장하지 않는 날이 없으니 말이다. 지혜롭고 선량한 국민들은 타락한 공직자의 모습을 보며 구토를 느끼고 침을 뱉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영합하고 모방하는 수도 많다. 심지어는 ‘모두가 더러운데 나만 어찌 깨끗할 수가 있느냐’고 구차하고 비열하게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공직자들이 보여주는 추악한 행태가 그대로 선량한 국민의 양심과 가치관으로 침투하여 온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공직자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마치 천 길 만 길이나 벼랑을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힘차다.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담을 상기하게 한다.
진정한 선비의 모습이 그리운 우리의 현실이다. (끝)
(2015.9.12)
지교헌 / 수필가
- 성균관대 문학석사·철학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한국경기수필문학회 회원
-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 <동양철학과 한국사상> 외 논저 및 수필집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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