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부활하는 아름다움, 클래식
음악이 '재연의 예술' 이라는 짐을 이해하면, 어렵게만 느껴지는 클래식에도 한결 편하게 다가갈 수 있다. 클래식이라는 장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수백 년 전의 음악을 오늘날에도 반복해서 듣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잘못 해석해서 클래식, 즉 서양 고전음악이 더 우월한 음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클래식의 생명력은 꾸준한 해석에 있다. 흔히 클래식 마니아들을 '변치 않는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클래식이야말로 새로운 연주를 계속 쏟아낸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수많은 버전이 있는 것도이 때문이다. 클래식 마니아들에게는 수백 번 들었던 곡도 새로운 버전이 나올 때마다 갓 태어난 음악처럼 신선하게 들린다. 왜 그토록 오래된 고전음악이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지에 대한 비밀이 여기에 있다. 더 우월한 음악이어서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노력이 지극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클래식의 생명력은 죽고 없어진 작곡
가에게 있는 게 아니다. 오늘 우리 옆에 있는 연주자와 열심히 들어주는 관객의 덕이다.
클래식 마니아들은 과거의 음악적 유산을 재해석한 새로운 연주를 비교하고 반복하며 음악을 즐긴다. 클래식은 비교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고, 그 욕망을 실제로 확인해보려는 노력이 있을 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이다. 클래식 음악을 졸린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경우 클래식을 '필수 교양 지식'처럼 접하기 때문이다. '알아야 하는 것', '외워야 하는 것'이 재미있기란 힘들다.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서 클래식 음악이 가진 해석의 스펙트럼을 알게 되면 그 안에서 펼쳐지는 변화와 기발한 시도의 다양성에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클래식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주기 위한 말을 하자면, 클래식 또한 현대사회의 상품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클래식 음악의 길잡이 전집들 을 살펴보면 수천 종이 넘는다. 하나같이 친근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선별해놓았다. 기본 레퍼토리로 반복되는 작곡자들과 곡은 대개 비슷비슷하다. 바흐, 베토벤, 브람스,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생상스, 비제 등이 등장하고, 이들이 작곡한 느린 악장, 귀에 쉽게 들어오는 오페라 아리아, 익숙한 멜로디의 소품들이 가이드 음반을 채운다. 길어봐야 10분이 넘지 않는 연주 시간도 중요하다. 전곡이 수록된 경우는 흔치 않다.
오늘날에도 소비될 수 잇는 새로운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해 300년 남짓한 클래식 음악은 쉴 새 없이 재해석되고 연주된다. 새로운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연주가들의 노력 또한 만만치 않다. 클래식은 연주가 핵심이다. 잘 모르던 어떤 클래식 음악이 다가왔다면 연주의 깊이가 각별해서였을 수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곡도 잘 연주되지 않으면 감동이 없다. 각 지역마다 오케스트라가 즐비한 유럽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어느 동네 오케스트라가 아무리 잘해도 베를린 필하모닉 같은 유명 오케스트라가 연습하는 것보다 못하다." 유명세를 따지는 말이 아니라, 연주 기량의 차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숱한 노력으로 최고로 훈련된 역량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디오 평론가로 한참 활동하던 시절에 기자들이 찾아오면 항상 묻는 질문이 "무슨 곡을 제일 좋아하냐?"였다. 이 곡은 이래서 좋고, 저 곡은 저래서 좋은데 딱 하나만 뽑으라니. 그때마다 난감했다. 어느 나는 비발디의 <사계>를 가장 좋아한다고 답해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말이 그대로 기사화되었다. 왜 좋아하는지 이유는 묻지도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촌스럽게 비발디의 <사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실제로 나는 비발디의 <사계)를 즐겨 듣는다. <사계>는 너무 유명하고 흔하게 연주되는 곡이다. 이 곡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우습게 아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연주의 기량에 따라 천변만화의 표정으로 다가오는 바이올린 독주가 <사계>의 매력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사계>만 30장이 넘는 음반을 모으게 됐다. 최근에 나온 디지털 음원까지 포함하면 40종 가까이 될 듯싶다. 각각의 연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끊임없이 새로운 연주가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 연주될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발디는 가볍게 여길 작곡가가 아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비발디의 <사계>를 듣는다. 겨울을 묘사한 부분이 제일 좋다. 휘몰아치는 삭풍의 세기와 차가움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소장하고 있는 음반 중 아이오나 브라운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특히 좋아한다. 그의 연주는 삭풍을 태풍처럼 들리게 한다. 겨울의 공포를 실감나게 묘사하는 탁월함에 매번 놀란다.
꽤 오래전부터 오디오 잡지에 나오는 단골 기사가 있다. "내일 죽는다고 할 때 단 한 장의 음반만 고른다면 어떤 음반을 꼽겠는가?"라는 설문조사다. 놀랍게도 90%에 가까운 사람들이 바흐의 음반을 꼽는다. 수많은 명곡을 뇌두고 왜 밋밋한 바흐의 음악을 선택하게 될까. 밋밋한 만큼 질리지 않고, 약간의 차이에도 연주자의 개성이 잘 느껴지기 때문이다.
바흐의 음악은 밥과 비슷하다. 밥은 색깔이 없다. 특별한 맛이 없다. 흔해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다. 바흐의 음악도 비슷하다. 어렵지 않고 도드라지지 않고 복잡하지 않다. 너무 많은 곡을 작곡해서 '바흐스럽다'는 선율이 이미 많은 이들에게 학습되어 있다. 어딘가에서 선율이 들리면 무슨 곡인지는 몰라도, '이거 바흐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보편적이기에 새롭게 탄생할 여지도 많다.
시대마다 수많은 연주가들이 바흐의 음악을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일에 도전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경우, 버전이 몇 개나 될까. 파블로 카잘스는 96세로 죽을 때까지 이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카잘스 외에도 그 이후로 수백 개의 새 버전이 나왔을 것이다. 지금도 새로 나온 음반들을 살펴보다 보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꼭 끼어 있다. 후대의 음악가들이 계속해서 도전하는 곡이기에 가장 보편적이고 생명력이 긴 것이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이와 같은 '재연' 프로그램들을 많이 만들고 있다. 얼굴을 가리고 나와서 부르든, 흘러간 옛 노래를 젊은 가수들이 다시 부르든, 얼마나 새롭게 해석했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열광한다. 기존의 버전을 고집하지 않고 재해석된 곡에 전율을 느끼는 이들은 낯선 음악에도 호의적일 확률이 높다. 어떤 음악 장르든, 어떤 곡이든 체험하기를 주지하지 않는 사람이 갖게 될 깊이를 이길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 2 >
성악의 흡인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매력적인 소프라노가 얼마나 많은가. 여왕과 같은 프리마돈나의 도도함, 음의 자리를 두고 벌이는 성악가들의 한판 승부, 이런 것들은 언제 보고 들어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헝가리 출신의 소프라노 실비아 사스Sylvia Sass는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외모에 기막힌 절창으로 제2의 마리아 칼라스로 불렸던 인물이다. 한때 실비아 사스의 LP를 구하기 위해 도쿄의 뒷골목까지 뒤질 만큼 광분했었다.
주변 사람들은 실비아 사스를 우습게 봤다. 그녀가 유럽 무대의 화려한 주역으로 활약하지 않아서다. 그녀가 인기 많은 오페라 대신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의 배역을 자처한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 상관없이 실비아 사스를 항한 순정을 이어왔다. 언제 들어도 좋은 그녀의 목소리는 변함없다. 지금도 그녀의 LP를 꺼내어 듣는다. LP의 매력이란 사진과 같아서 젊음의 상태를 그대로 보존해준다. 1951년에 출생한 그녀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전설의 소프라노는 적어도 내 방의 턴테이블 위에선 전성기의 힘과 매끄러운 음색을 그대로 내준다. 살면서 죽도록 좋아했던 인물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이처럼 자기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음악가를 찾고, 그녀 혹은 그를 향한 순정을 바친 기억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훌렁한 음악애호가는 없다.
위안의 음악들은 대개 비슷한 지점이 있다. 느린 선율과 귀에 감기는 멜로디, 섬세한 연주가 더해진다. 쉽게 기억된다. 그렇게 내게 편안한 음악의 리스트를 점점 늘려가면 된다. 영화에 삽입된 곡도 좋고 카페에서 들었던 오페라 아리아의 선율도 좋다.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게 중요하다. 스마트폰과 유튜브로 연관 검색을 해보면 곡과 관련된 정보들은 넘치도록 많다. 내가 아는 젊은 음악 애호가 중에는 컴퓨터 게임을 즐기다 그 배경음악 덕분에 오케스트라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도 있다.
내용을 알게 되면 음악이 살갑게 다가온다.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 아는 곡의 앞뒤를 연결해보면 좋아하는 음악이 놓여 있는 자리의 전체적인 모습이 들어온다. 이렇게 관심의 지평이 늘어가는 것이다. 누구에게 드러낼 것도, 음악 퀴즈를 풀 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꾸준하게 음악을 들어 자기의 세계를 넓혀 가면 된다.
특히 극소와 극대의 양면성을 지닌 클래식 음악의 스펙트럼은 촘촘한 계단과 같다. 이를 순서대로 배워가면서. 음악 지식의 계보를 따라 감상하겠다는 건 무리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먼저 다가오는 일이 중요하다. 작곡가의 이름을 외우고, 마치 수표 번호 같은 곡명과 알레그로, 모데라토와 같은 악상기호를 알아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도 된다. 거듭 말하지만 클래식의 아름다움은 작곡가뿐 아니라 연주자의 기량에 더 좌우된다. 음악이 좋게 다가왔다면 연주와 녹음의 우수함 때문일수 있다. 들어서 기억에 남고 다시 듣고 싶은 곡들이 많아졌다면 클래식의 맛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선은 불 꺼진 방에 있는 코끼리를 더듬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좋아하는 음악이 생기면, 그 옆의 것으로 옮겨 가면 된다. 그러다 보며 나중에 자신이서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보일 것이다. 처음에는 안개속에 있는 듯하다가, 작은 영토 정도를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전체 지도가 눈에 들어오고, 자신이 그 지도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가 느껴질 때가 온다. 그때 재미가 확 늘어난다.
친절한 안내인을 잘 선택하면 큰 도움이 된다. 라디오 청취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친절한 해설과 함께 선곡표를 제공하는 방송국의 노력은 늘 고맙다. KBS IFM 라디오의 진행자 정만섭은 좋은 선곡으로 소문이 났다. 전 세계에서 발매되는 신보 가운데 공들여 선별한 음악을 꾸준히 소개하는 부지런함으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그가 세월호를 기억하며 4월 16일에 고른 곡의 리스트도 화제가 되었다. 푸치니, 브루크너, 쇼팽, 피아졸라 등의 음악이었다. 아마 이날 방송을 들은 이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음악이었어도 훨씬 강렬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모르는 음악이었어도 강하게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자기만의 맥락이 생겼기 때문이다.
< 3 >
팝과 록에 빠져들었던 내 경우가 그랬다. 충분히 어떤 음악이 좋아지니, 다른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관심이 클래식으로 넘어갔다. 교양인임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클래식 감상이 유행하던 당시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러나 필수 교양으로 다가온 클래식 음악은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라디오가 큰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수용자 입장에서 선곡해서 들려주는 음악을 흡수했다. 몇 년을 계속 듣다 보니 클래식 음악이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받아들였고 내용을 알아갔다. 시대 배경과 곡을 연결해보았다. 음악이 입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재미가 생겼다.
클래식 애호가들도 나름의 전문 분야가 있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같은 시대적 기호를 가지거나, 기악, 성악 등 분야별 선호로 나누어지게 마련이다. 좁고 깊게 파고들어 특정 작곡가 혹은 연주자를 서열화하는 경향도 있다. 난 이런 태도를 그리 좋게 여기지 않는다. 음악 애호가들을 만나보면 특정 작곡가에 대한 자신의 선호를 음악감상의 수준처럼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있다. 말러를 좋아하면 수준이 높은 것이고, 모차르트나 비발디를 좋아하면 하수로 취급하는 이도 있다. 그런 반응은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된다. 음악의 선호에 어찌 서열이 있을까. 온갖 음악을 들어보면 모차르트의 순진무구한 투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비로소 알게 된다는 이야기는 아껴두는 게 좋겠다.
취향은 지속되는 성장이다. 매일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에 음악을 흐르게 하는 사람만큼 위대한 감상가는 없다. 택시를 운전하시는 분들 가운데 클래식 마니아들이 꽤 있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FM 방송을 꾸준히 듣는다는 특징이 있다. 음악을 듣는 힘으로 힘든 시간을 버틴다는 분들이다. 택시를 타면 그분들이 좋아하는 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고독한 시간도 다채롭다. 음악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아 더욱 강렬한 세계이다. 격한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을 극대화하기 위해, 음의 세세한 세계에 집중할 때, 사람들은 고독해진다. 음악에 완전히 몰입할 때는 오로지 홀로이다. 내 방에 들어와 차분하게 일대일로 마주할 때, 음악은 자신의 세계를 오롯이 다 보여준다. 홀로 있어도 위안의 음이 흐르면 따뜻하고, 거센 음이 흐르면 집 안에 있어도 세찬 바다 위에 놓인 듯 위태롭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이들은 좋아하는 음악도 없다 모두가 아는 곡을 자신도 좋아한다고 믿게 된다. 골방에 홀로 틀어박혀 다양한 음악을 들어보자.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훨씬 쉽게 알게 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허송세월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과 음이 진지하게 마주하는 경험을 한 이들은 자신감이 강해진다. 낯선 음악의 세계에도 들어가고 싶은 도전의식이 생긴다. 그러고 나면 클래식 공연을 들을 때 언제 박수를 쳐야 하는지와 같은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취향은 곧 갈증의 세계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충족되지 않는 불균형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어렵고 까다로운 음악에도 발을 들여놓게 된다. 독서를 많이 하다 보면 어렵고 두꺼운 책도 손에 잡게 되듯이 음악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음악의 세계는 방대하다. 그 끝 모르는 심연의 상태로 빠져들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더 뿌듯할지 모른다.
언젠가 작정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가 지휘한 말러 교향곡을 차례로 들었다. 다 듣기 전에는 나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이었다. 마리스 얀손스는 말러의 음악을 가장 말러답게 해석했다. 삶과 죽음 사이의 파행일 뿐인,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잡아내는 듯한 음이 이어졌다. 그렇게 진한 경험을 하고 나니, 더 이상 말러의 음악이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았다.
윤광준 / ‘심미안의 수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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