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모차르트- '혁명적인' 예술가

송담(松潭) 2020. 6. 28. 15:33

모차르트- '혁명적인' 예술가

 

 

 

 

“아인슈타인 박사님, 죽는다는 것이 뭘까요?”

“그건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듣지 못하는 것이야.”

 

예술과 역사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천재 예술가는 시대를 뛰어넘는 사람일까, 아니면 천재라도 그 시대의 흐름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는 것일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활동하다가 혁명이 한창 궤도에 올라 있던 1792년에 사망한 모차르트를 통해 그 시대를 읽어 볼 수 있을까?

 

궁정 하인, 천재 음악가

 

세상에 수없이 많은 예술가들이 있지만 모차르트야말로 가장 천재다운 면모를 잘 보여 준 사람이다. 그는 세 살부터 하프시코드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1년 뒤부터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했다. 그리고 여섯 살부터 신동으로 일컬어지며 연주 여행을 하고 다녔다. 우리는 영화나 소설을 통해 모차르트에 대해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눈을 감고 하프시코드 치기,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차례로 연주하기, 즉석에서 작곡을 하여 연주하기.... 조그마한 꼬마는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손에 이끌려 전 유럽의 왕실을 돌며 이런 묘기를 보여 주었다. 빈에서는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소곡을 연주한 다음 황후의 무릎에 기어 올라가 어리광을 부리고, 30년 후 파리의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게 될 어린 시절의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와 함께 미끄러운 궁전 바닥을 스케이트 지치듯 미끄럼을 타다가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 일가는 베르사유 궁전을 비롯해서 유럽 각국을 도는 연주 여행을 했지만, 번 돈의 대부분은 여행 경비로 들어갔기 때문에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나중에 한 번 더 이런 식의 연주 여행을 했지만 20세가 넘자 더 이상 귀여운 꼬마의 '묘기 대행진' 방식이 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볼 때 이런 여행은(CD 플레이어와 MP3가 없던 그 시절에), 모차르트가 세계의 음악계를 경험하고 대가들을 직접 만남으로써 그의 음악 세계를 정립하고 음악적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데 둘도 없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차르트는 결국 빈의 빈민굴에 정착해서 작곡 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그의 생활은 아주 빠듯했다. 그나 그의 아내나 모두 경제적 계산 능력이 없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살리에리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인들과의 갈동이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처럼 살리에리가 그를 독살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 곡인 '레퀴엠'과 관련된 일화도 소설이나 영화와는 다르다. 발제크라는 백작이 모차르트에게 돈을 주고 이 곡을 작곡하게 한 다음 자기 작품이라고 속이려던 일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작곡을 재촉하는 백작의 하인이 검은 옷을 입고 찾아와서 다 되었느냐는 물음을 자꾸 던진 것이 극적으로 와전된 것이지, 살리에리가 그를 과로사로 몰아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작곡 활동은 마치 마감을 앞둔 신문기자와 같았다. 극장 매니저가 아이디어를 던져 주면 그 자리에서 작곡하고 30분 후부터 악사들이 연습에 들어갔다. 이런 곡들이 모두 불후의 명작으로 남은 것을 보면 그가 천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과연 '천재'라는 것이 무엇일까 다시 한번 물음을 던져 볼 만하다. 그가 순식간에 작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각 악기들의 음색, 그것의 역량과 조합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 음악계에 널리 퍼져 있던 음악적 관행들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인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철저한 음악교육을 받은 데다가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그런 방식의 음악을 연주하고 배운 모차르트로서 그런 일에 정통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는 '궁정'에 붙어먹고 살았던 '시민'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양쪽 세계 모두에 걸쳐 있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궁정에 고용된 소시민 유형의 음악인이었다. 이때 그의 지위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인'이었다. 물론 음식을 준비하거나 짐을 나르는 잡급직 하인은 아니고 전문직 하인 또는 고급 하인이었지만, 어쨌든 하인은 하인이었다. 그의 음악도 분명히 그를 고용한 궁정 인사들의 취향과 요구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는 궁정 귀족들의 여흥을 위해 봉사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궁정은 그의 음악이 펼쳐지는 구조이자 틀이었다. 특히 독일에는 소규모 궁정들이 많아서 각 궁정마다 소속 음악가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수공업적 궁정 음악의 발전 배경이 되었다.

 

모차르트에게 이런 삶의 가능성을 열어 준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들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높은 실력을 갖춘 정상급 음악인이었으며, 그런 그가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집중적인 음악 교육을 시킨 것이 모차르트의 재능이 활짝 피어난 중요한 요인이었음은 분명하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도 마찬가지로 궁정 소속 하인과 같은 지위의 음악인이었지만, 다만 아들에게 최고의 실력을 키워 줌으로써 하인 음악가 중에서는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자유예술가를 선언하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결국 자신의 이런 처지에 대해 분개하게 되었다. 자신을 하인 취급하는 대주교와 다투다가 대주교가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는 유명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모차르트의 불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귀족들에 대해서 떳떳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기 음악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귀족들에 대해 일종의 반란을 시도하였다. 그의 짧은 인생 후반기에 그는 자유예술가를 선언하였다.

 

이제 그는 궁정 귀족들의 돈주머니에 기대지 않고 그의 음악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근거로 살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살고자 한들 물질적 토대, 곧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유로운 음악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유로운 창작을 하고 그 결과를 악보 형태로 팔든지, 자신이 주관하는 음악회를 열어 입장 수입을 얻음으로써 독자적인 생활과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음악을 향유하는 주된 층이 귀족이 아니라 시민층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시대에는 아직 이런 기반이 조성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음악을 위해 기꺼이 돈을 내는, 부와 교양을 갖춘 시민 계급이 아직 채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로서는 결국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지만, 그렇더라도 다시 봉건 귀족의 발 아래로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빈민굴에서 살면서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그의 자세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의 음악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궁정적· 귀족적 음악 전통을 벗어던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 속에서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추구한 수준이었다. 요컨대 자신의 음악을 두고 감히 간섭하려는 오만한 귀족들을 참아 내지 못한 것이지, 그가 어떤 보편적인 정치 이념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정치? 그런 문제라면 그는 차라리 무관심했다. 모차르트가 혁명 이념에 동조했다든지 특정한 정치적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다음에 세 사람의 유명한 작곡가들을 비교해 보면 이 사실을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보다 조금 선배 세대인 하이든은 '완전무결한' 하인이었다. 그의 초상화에 그려진 옷은 하인 복장 그대로이다. 그는 그런 지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궁정 세계에 살며 그곳의 주파수에 맞춘 음악을 만들었다. 다만 그런 음악가 가운데 최고의 수준에 올랐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좋은 대우를 받았을 뿐이다.

 

모차르트의 후배 세대인 베토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았다.그는 이제 자신의 음악을 귀족들의 취향에 맞추는 따위의 일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는 자기가 독립적인 예술가라는 의식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음악적 주장을 과감하게 펼쳤다.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이해해야지, 그가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음악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는 더 나아가서 자신의 음악을 통해 인류 일반에 호소하는 고상한 가치를 주장했다.

 

말하자면 모차르트는 하이든 시대에서 베토벤 시대로 나아가는 전환기에 살았던 셈이다. 그는 한편으로 궁정에 매여 있으면서도 자신의 음악을 자유롭게 펼치는 자유음악가를 추구하였다. 그러니 그의 삶이 편했을 리가 없다. 그의 지지자였던 귀족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도 그의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었던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된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왜 '피가로의 결혼'을 선택했나

 

귀족들과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이런 점에서 주목할 만한, 매우 흥미로운 사례이다.'피가로의 결혼'은 보마르셰의 희곡에다가 모차르트가 곡을 붙인 오페라이다. 원작 희곡은 루소, 볼테르의 작품과 함께 프랑스 혁명을 예비한 작품으로 알려질 정도로 그 시대의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는 내용이다. 희곡과 오페라 모두 큰 줄거리는 거의 같다. 그 내용은 귀족과 하인 사이에 초야권(初夜權)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초야권이란 귀족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결혼할 때 그 귀족이 신부와 첫날밤을 지낼 수 있다는 봉건적인 권리이다. 아마도 봉건적인 권리 가운데서도 인격적으로 가장 모욕적인 것이리라, 주인공 피가로는 이발사.출신으로서 알마비바 백작의 하인으로 일을 하다가 백작 부인의 시녀 수잔나와 결혼을 하려 한다. 백작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초야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바 있지만, 수잔나가 마음에 들자 그녀에 대해서 초야권을 부활하여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다. 실제 스토리는 꽤 복잡하게 가지를 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수잔나와 백작 부인이 함께 계략을 꾸며서 백작이 속임수에 넘어가 창피를 당하고 결국 무릎을 꿇고 백작 부인에게 사과하며, 피가로와 수잔나는 행복하게 결혼한다는 것이다. 스토리 자체가 하층 신분과 귀족 신분 사이의 갈등, 또 남녀 간의투쟁을 다루는 도발적인 내용이다.

 

이 투쟁의 의미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과연 이것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봉기를 부추기는 내용이라 볼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그런 갈등을 연극이나 오페라라는 놀이마당에서만 풀고, 그래서 갈등의 정도를 낮춤으로써 실제 사회의 압력을 완화시키는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별 의미 없는 한바탕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사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귀족들도 보고 웃었다는 점에서는 이 작품이 그렇게 심각한 도전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삶을 영화로 만든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드는 데 대해 황제가 금지하려고 했을 때 모차르트가 이 작품은 아무런 정치적 의미가 없는 웃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먼저, 하고많은 이야기 중에 당시 말 많고 탈 많은 이 희곡 작품을 가지고 오페라를 만들겠다는 모차르트의 의도가 정말로 웃기 위한 좋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봉건 귀족과 갈등을 겪고 있고 그에 반발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열겠다고 나선 그가 다름 아닌 봉건 귀족을 골탕먹이는 하충민 주인공의 이야기를 고른 것이 정말로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는 음악적인 분석을 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컨대 이 오페라에서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노래인 ‘편지의 이중창’을 보자. 백작 부인과 수잔나가 함께 부르는 이 노래는 계급 관계가 다른 두 사람이 가부장적 남성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해 함정을 꾸미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인간을 골탕먹이기 위해 함정을 파는 일이라 그 은밀한 즐거움은 말로 다할 수 없고 그것을 논의하는 그 순간 공모자들은 최고의 행복감에 젖어 있다. 바로 그 순간을 노래하는 이 이중창은 가장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해 남성들은 노래든지 무대 위에서의 위치든지 서로 대립하거나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위협받는 듯한 분위기 속에 있다. 적어도 이런 점을 보면 여성은 조화롭고 아름다운 힘을 가진 반면 남성은 분산되고 무력한 상태에 있으며, 귀족들은 스스로의 힘을 믿고 아랫사람들을 억압하려다 오히려 곤경에 빠지고 패배하고 만다.

 

모차르트가 혁명을 주장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혁명적인' 인물이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자신도 모르게 읽어 냈고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 혁명적인 변화의 씨앗은 춤과 노래 속에, 사람의 느낌 속에, 어쩌면 공기 속에 떠돌아다니며 발아할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주경철 / ‘문화로 읽는 세계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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