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베어트리파크

송담(松潭) 2020. 1. 19. 05:17

 

 

베어트리파크

 

 

 

 

 

향나무는 나를

비밀 공간으로 데려간다

 

 

 낮선 동네란 들를 일이 없어 가지 않은 곳이겠고, 친숙한 동네란 들를 일이 많아 자주 가는 곳이겠다. 특정 장소가 친숙하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만큼 방문 횟수가 많다는 의미다. 결국 특정 장소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동인은 생활의 수단인 업무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지역을 이동하며 살지 않는다. 생활 반경이 넓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가 볼 수 있는 부산이나 목포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는 이들도 봤다. 제 삶을 펼칠 공간 반경이 넓은 사람은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며 산다. 갈 곳이 없는 사람은 똑같은 모습만 보기 때문에 삶이 지루해진다.

 

 한 사람이 50년간 가꾼 종합선물세트 같은 수목원 '베어트리파크(Bear Tree Park)'를 알게 됐다. 이름이 독특했다. '베어(bear)'라면 곰이고, '트리(tree)'라면 나무다. 곰과 나무가 있는 공원인 것이다. 곰은 동물원에 있어야 하고, 풀과 나무는 수목원에 있어야 한다. '곰과 나무가 함께 있는 공원이라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먼지 둘러본 사람들은 베어트리파크의 경관과 시설을 높이 샀고, 관리가 깔끔하다고 칭찬했다. 신문과 방송에 나와 아는 사람들에겐 이미 알려진 명소이기도 하다.

 

 설립자 이재연은 대기업에서 사장을 지낸 분이다. 나무와 분재를 가꾸는 취미가 발전해 50년 넘는 세월의 흔적을 모아 두게 됐다. 경기도 의왕시에 있었던 나무를 이곳으로 옮겨 현재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좋아하는 식물과 자연물을 수집해 채워 넣은 양은 어마어마했다. 그동안의 수집물은 산 하나를 포함한 5만 평 가까운 면적에 채워 넣어도 비좁게 느껴질 정도다. 한 인간의 집념은 강하고 커 보였다. 감동은 자연보다 사람에게서 더 진하게 왔다.

 

베어트리파크라서 느껴지는 당혹감이 있다. 너무 많은 것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베어트리파크는 처음엔 설립자의 과욕으로 넘친 공간이 아닌가 싶었다. 오랜 세월의 시간이 묻어 배인 깊이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마치 종합선물세트같은 산만함이 거슬렸다. 내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몇 번을 더 찾은 다음에야 비로소 베어트리파크가 왜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됐다.

 

 정원이라 하기엔 양식화된 특징이 없다. 일본식으로 인공미가 풍기는 것도 아니고, 한국식으로 손대지 않은 자연미가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영국이나 독일식으로 펼쳐진 숲 같은 인상도 아니다. 이 공간을 여느 정원의 유형으로 나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모은 수집품을 종류벨로 분류해 분산 배치한 공원일 뿐이었다.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는 수집품의 열거가 주목적이 된다. 이들이 모아져 풍기는 공간의 분위기와 인상은 각자 알아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베어트리파크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릴 듯했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푸름과 새로움이 있다

 

 평생 목표를 정해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간 기업인의 성격과 결단이 느껴졌다. 현재의 베어트리파크는 조성된 지 10년 남짓 되었다. 시간을 들여 가꾼 원래의 징원이 지닌 아름다움은 장소가 바뀌는 순간 사라질 개인성이 컸다. 설립자 이재연의 고민이 공감되기 시작했다. 이전(移轉)을 계기로 수목원의 새로운 목표와 콘셉트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수목원의 운영을 위한 수익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특정 양식을 따르지 않은 파격의 선택이 이뤄진 이유다.

 

 베어트리파크의 길은 여느 수목원과 달리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다. 자연의 정취를 느끼는 대신 접근의 편의성을 우선한 선택이라 하겠다.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는 것은 몸이 불편한 이들도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설립자 자신이 고령인 이유도 있겠지만, 이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많은 수종은 향나무다. 최소 50년에서 100년은 됐음직한 커다란 향나무가 하나같이 전지 작업을 거쳐 둥그레졌다. 몇 그루의 향나무만 있다면 인위적인 성형의 부자연스러움이 거슬렸을지 모른다. 이런 향나무가 군락을 이뤄 산자락을 덮었다. 둥글게 이어져 시야를 채운 향나무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인공의 자연을 연출한다. 이토록 많은 양의 향나무를 한곳에 모아 놓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시도일지 모른다. 규모의 압도감으로 다가오는 이런 정원은 처음이다. 만든 이의 생각이 보통 사람과 얼마나 다른지 확인했다.

 

 평생의 공력을 들인 분재는 별도의 전시 공간에 따로 모아 뒀다. 축소된 고목인 분재는 일 년 사계절을 그대로 보여 예술품이 만들어진다. 그 양이 수백 그루를 넘겼다면, 들어간 시간과 지켜보는 과정으로 평생을 바쳤다는 말이 된다. 멋지다. 그리고 숙연해진다.

 

 수집된 소나무도 한곳에 모아 두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보기 위해 들었을 시간과 노력의 절감을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소나무를 이토록 다채로운 자태로 키워 냈다는 것은 내가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식물은 알지 못하면 절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반면 알게 되면 이것만큼 재미있는 대상도 없다. 소나무가 그렇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도 많이 심어져 있다. 수피가 벗겨져 안이 하얗게 드러난 나무는 이미 죽은 듯하다. 나무의 윗부분에 돋아난 푸른 나뭇잎은 분명히 한 몸체에서 나왔다. 생명의 경이로움은 이내 숙연함으로 바뀐다. 삶과 죽음은 떨어져 있지 않다는 성찰의 메시지 같다. 전국 각지에서 옮기거나 씨앗을 틔워 키웠다는 느티나무도 인상적이다. 뿌리가 잘리고 새로운 땅에 옮겨지는 생사의 과정이 담겨 있다. 그 다음의 이야기를 잇기 위해 나무는 지금 이렇게 서 있는지 모르겠다.

 

 바깥을 가려 정원 안에 몰입하게 만들다

 

 베어트리파크는 정통 정원을 버리고, 태마파크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다고 정원이 아니라 할 수도 없다. 몇 번을 찾아 곳곳을 거닐어 봤다. 도대체 왜 이런 정원이 만들어졌을까, 산 정상의 전망대에 오르자 의문이 풀리는 듯했다. 좌우를 둘러보니 전신주가 어지럽게 세워져 있고, 산 사이로 터진 너른 땅은 정원의 배경으로 삼기엔 부적당했다. 우리의 정원은 주변의 풍광을 끌어들이는 차경(借耕)이 전제되어야 한다.

 

 정원은 주변과의 조화로 완성을 이룬다. 베어트리파크의 입지는 차경을 할 수 없는 지형이다. 차라리 주변의 시야를 차단해서 고립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짙은 향나무로 담장을 두른 듯한 이유를 납득했다. 베어트리파크 안에서는 바깥이 잘 보이지 않는다. 눈앞의 아름다움에만 몰입시키기 위한 장치가 다양한 수종으로 이루어진 구역인 것이다. 이는 내가 베어트리파크를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을 극복한 새로운 양식의 정원으로 보는 이유다.

 

 정원의 목적이란 현실에 이상의 낙원을 만들어 보려는 게 아니던가. 바깥을 가려 안쪽만을 들여다보이게 한 고심의 낙원이 베어트리파크였다. 평생 정원을 가꾸는 데 전념했던 한 인간은 세상의 격식과 규칙을 깨 버리는 선택으로 자유롭게 됐다. 우리나라 사람의 특질이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받아들이자 베어트리파크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한 인간의 시간과 노력에 경의를 보내며 원내를 돌아보는 즐거움이 커졌다.

 

 아직도 보지 못한 나무와 꽃 들이 많다. 며칠 전에도 조용히 이곳을 찾았다. 숨 막힐 듯 완벽해서 외려 불편했던 인공 정원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넉넉함이 있어 좋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피어나는 꽃과 푸르른 나무는 여전했다.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새로움이 무엇인지 알겠다. 앞으로 세종시를 찾을 이유가 생겼다.

 

 윤광준 / ‘내가 사랑한 공간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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