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 사옥 / 미술관
아모레퍼시픽 사옥도 성공한 개인과 회사의 신화가 담긴 곳이다. 국제 건축 설계 공모를 통해 영국의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요즘 잘 나가는 유명 건축가로, 세계 여러 곳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건축가의 명성 때문에 아모레퍼시픽을 좋아한다면 멋쩍다. 난 데이비드 치퍼필드에게 관심이 없다. 그가 만든 멋진 건축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시선에 동조할 뿐이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덜어내 넉넉하고 비워져 풍요로운 대비의 절묘함으로 빛난다. 설계자의 미학과 건물주의 넉넉한 인심이 만나 이룬 아름다움이 건물 곳곳에서 풍긴다.
조선 백자를 닮은 건물은 그 안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조선 백자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건물은 소담스럽다. 둥근 백자의 넉넉함을 육면체의 건축물로 바꾸어 놓았다고나 할까. 보기만 해도 배부를 듯한 백자의 불룩한 어깨선이 연상되는 독특한 비례다. 건물의 중간엔 구멍이 뚫려 있다. 위쪽에서 보면 가운데도 비어 있다. 건물 내부를 비워 두어 생긴 공간이다. 공간 효율성을 따지자면 엄청난 낭비다. 비운 공간으로 시야가 관통된다. 건물 내부에선 밖이 보이고 밖에선 안이 들여다보인다. 외부와 내부가 건물 안에서 만나는 접점이 비워진 공간인 셈이다. 그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간다.
건물의 구조는 저절로 중정을 만들게 된다. 여기에 나무가 자라고 풀과 이끼를 돋게 했다. 건물 안을 생명이 사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사방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빛과 바람이 홀러들고 분다. 비워져 있지만 넉넉한 순환의 증폭이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비어 있는 부분을 둘러싼 건물은 띄워진 거리 이상의 양감을 지닌다. 건물 전체가 크고 여유 있는 인상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날렵함 대신 두툼하고 묵직해 보이는 안정감이다.
비어 있는 건축 구조가 극대화되는 지점은 1층 로비다. 가운데 지점에서 위를 보라. 와플과 비슷한 격자 모양의 유리창 너머로 하늘이 보인다. 내용을 모르면 그저 그런 장식으로 비춰질지 모른다. 이는 건물의 비워진 공간만큼 덮어 로비에 비가 새지 않도록 한 장치다. 평소에도 유리창에 물이 흐르게 해 시냇물과 같은 효과를 낸다. 고층 건물의 가운데를 텅 비우고 하늘과 물을 보게 한 건물의 아름다움을 놓치면 안 된다. 건물에 하늘을 담은 배포 큰 건축가와 이를 수용한 건축주의 장단이 이끌어낸 성과다.
용산에 이런 건물이 세워질 줄 몰랐다.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얄밉도록 세련되고 멋진 건물을 남겼다. 사각의 콘크리트를 감싸고 있는 외벽은 둥근 파이프를 이어 놓았다.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도, 마치 수많은 나무가 이어져 숲의 질감을 만들어 내듯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건축물은 안이 아름다워야 진짜다. 드러난 외형만큼 내부까지 신경 써야 완결이다. 유럽의 건축물을 돌아보면서 진심으로 부러웠던 건 안팎의 조화와 정교한 마무리였다. 보이지 않는 부분마저 완벽을 기한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건물 밖을 보는 것은 잠깐이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건물 안에서 펼쳐진다. 건물 안이 더 아름다워야 할 이유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바깥의 독특함만큼 건물 안의 아름다움도 돋보인다.
아모레퍼시픽 로비는 시민들을 위한 공원 역할을 한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으니 모두의 공간이다. 서울에서 이런 건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한정된 도심의 땅과 공간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어 쓰는 시도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서울 종로2가에 있는 D타워 같은 건물이 이런 생각을 먼저 실천했다. 차량 위주의 도시 설계로 악명 높은 서울의 숨통을 터 준 셈이다. 현대관 공원은 숲과 연못이 없어도 된다.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가운데에 길을 내주면 된다. 사람들이 모이면 그 다음을 채우는 일은 쉽다. 현대의 공원과 상가는 건물 사이와 내부에서 그 힘을 키워 가는 중이다. 건물 로비를 시민들에게 돌려준 아모레퍼시픽의 씀씀이는 돋보인다.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이 하나 들어선다는 게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 놓는지 공감할 일만 남았다.
미술관은 건물 내부 지하층에 있다. 건물 밖에 놓인 조각품을 감상하며 미술관 입구로 들어서자 전시장으로 쓰는 큰 규모의 공간 스케일이 놀랍다. 높은 천장과 격벽이 제거된 실내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대단한 곳에 들어선 압도감이 든다. 매번 신선한 기획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높은 천장 어디에선가 비춰 주는 고품위 조명은 전시의 내용을 인상 깊게 만든다. 표면 반사와 빛의 얼룩이 없어 집중하게 되는 미술품은 두 배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를 위해 독일산 첨단 조명장치가 보이지 않게 숨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안다.
요즘엔 별 일 없이도 아모레퍼시픽 건물에 들른다. 아니다, 미술관에 가기 위해 일부러 간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좋다. 걸음이 느려지면서 건물을 뜯어보게 된다. 오래 머물면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비로소 이해되는 비례와 균형의 선택들이다. 직원들만 출입할 수 있다는 5층 중정에도 가 봤다. '역시!'란 감탄을 감출 수 없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이 보이는 주변의 다른 건물과 동네는 조망 프리미엄을 누린다. 아름답고 멋진 건물의 영향력은 현실적 효용성으로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용산, 아니 서울, 아니다! 우리나라가 자랑할 만한 건축물을 갖게 됐다는 자부심부터 먼저 챙겨야 순서다.
윤광준 / ‘내가 사랑한 공간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