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필드
눈이 즐거운 곳에선
발걸음도 느려진다
하남시 쪽 올림픽 대로의 끄트머리는 많은 차량으로 유난히 혼잡하다. 2016년 가을 이후부터 주말이면 이곳은 교통이 마비되곤 한다. '스타필드 하남'이 들어선 이후의 변화다. '복합쇼핑몰'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낯선 건물은 생기자마자 화제로 떠올랐다. 도대체 스타필드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이 찾는 것일까. 유명 브랜드의 프리미엄 때문일까? 아니면 그동안 마땅한 쇼핑몰이 없었던 이 지역의 기대감 때문일까? 볼거리, 놀 거리, 먹을거리가 한 자리에 갖추어져 있다는 기능적 편의성 때문일까? 어떤 이유이든 새로 생긴 쇼핑몰은 돌풍을 일으키며 곧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현재 고양시를 거쳐 위례시와 부천시에서는 '스타필드 시티'라는 이름으로 성업 중이다. 이들은 모두 서울 외곽에 위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타필드의 영업 전략은 나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그보다 새로운 공간이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스타필드 주변에 사는 주민이자 이용 빈도가 높은 내게도 이곳은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 살림에 필요한 물건을 사고 밥을 먹는다. 사람들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영화를 보기도 한다. 상층에 있는 찜질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운동 시설에서 체력도 키운다. 자동차의 타이어를 교체하기도 하고 별렀던 세차도 한다. 멍하니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건물의 높이가 아닌 길이에 주목하라
스타필드는 건물 크기와 범상치 않은 외부 장식으로 시선을 끈다. 하지만 규모가 큰 백화점이나 쇼핑몰은 부산과 대구에도 있다. 특이하고 세련된 건물의 인테리어라면 다른 곳도 만만치 않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간이라면 뭔가 다른 차별적 요소가 있는 게 분명하다. 우선 가 보시라. 안에 들어서면 바로 지금까지 봤던 쇼핑몰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건물의 비례 때문이다.
건물의 규모를 키우는 방법은 두 가지다. 땅이 좁다면 높이를 올려 고층으로 짓고, 반대라면 옆으로 넓히면 된다. 우리나라처럼 땅값이 비싼 곳에선 당연히 고층 형태의 건물이 많다. 고층 건물에선 공간을 넓게 사용하는 데 인색해지게 마련이다. 새로 생긴 스타필드는 기존의 상식을 깼다. 넓은 땅에 길이를 늘인 건물을 만들었다. 기다란 건물이 주는 느낌이 얼마나 다른지 말로는 실감하기 어렵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봤던 대형 쇼핑몰은 길이가 수백 미터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펼처진 실내 모습에 무척 당황했었다. 그동안 내가 겪은 건물이란 고작 조각으로 나누어진 방에 들어서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시선의 확장이 주는 인상은 강렬했다. 우선 답답하지 않아 좋았다. 너른 광야가 주는 해방감 같은 기분이랄까.
크기의 압도감은 건물의 길이에서도 생긴다. 우리나라에서 높이가 아닌 길이를 강조한 건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익숙했던 수직 구조의 관성에서 벗어난 시각 체험의 효과라 할 만하다. 게다가 건물 내부는 비워져 있다. 전체로 보면 가운데를 비우고 주변의 테두리를 매장으로 채운 직육면체가 되는 셈이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격언을 누가 모를까. 알지만 꾹꾹 채워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런데 스타필드는 돈이 되는 매장 수를 늘리는 대신 시선의 여유를 위해 비위 두는 선택을 했다. 비워진 공간의 주변에 매장의 쇼원도가 들어서 있다.
통로를 이어 기나긴 길이 만들어졌고, 좌우를 연결하니 자연스럽게 순환로가 되었다. 진열된 상품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걷는 일이 즐거워진다. 이동하기 위해 걷는 게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앞쪽의 시선과 비워져 보이는 위아래 층의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위층에 있으면 아래층의 브랜드숍 간판이 보인다. 아래층에선 위층의 디스플레이가 눈에 띈다. 교차의 시선은 발견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다.
천장의 일부를 터 햇빛이 들어오게 한 자연 채광 효과도 신선하다. 건물 안에서 하늘의 구름이 떠다니는 풍경까지 볼 수 있다. 건물의 가운데를 비웠으니 어느 충에서도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고층 건물이라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하늘에서 비추는 햇빛은 벽으로 막힌 방을 지나 바닥까지 닿는 법이 없다. 걷다가 하늘이 보이는 건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이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무딤을 탓하는 게 맞다.
걷고 싶은 마을의 축소판
내부는 거리의 축소판이다. 도시의 일상은 서로를 바라보는 일로 시간을 채운다.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화려한 조명이 비춰지고 멋진 색채가 돋보이는 길 위에선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 스타필드에선 옷을 멋지게 입고 나온 사람들이 많다. 자신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서일 게다. 남들이 보는 시선을 즐기며 자기표현을 할 기회로 삼는 것이다.
그토록 걷고 싶었던 서울 도심에선 이젠 더 이상 걷지 못한다. 자동차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혼잡함을 헤치며 우아하게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은 이제 건물 안에 있다. 그 길에서 서로가 서로를 쳐다본다. 단장시킨 강아지와 고양이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허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물건만을 사기 위해 쇼핑몰에 들르지 않는다. 도시의 삶이 연장되는 공간의 역할이 더해졌다. 삶과 놀이와 축제는 이제 떨어질 수가 없다.
스타필드에선 서로의 간격과 널찍한 공간의 여유까지 모든 게 넉넉하다. 천천히 걷거나 통로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람 구경만큼 지루하지 않은 볼거리도 없다. 장터와 골목, 광장 같은 데서 벌어졌던 일이 일 년 내내 이어진다. 사람이 만든 풍경은 되풀이되는 법이 없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지라 매번 새로운 드라마가 펼쳐진다. 사람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스포츠 중계에 열광하는 관전의 묘미와 비슷한 데가 있다. 걸을 수 없게 바뀐 도시의 길과 골목이 만들어 놓은 역설이다.
스타필드 안에서 도시 공간의 허기를 채우다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모든 시선을 빼앗겨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아파트에 산다. 안에서 할 일이란 대부분 비슷하다. 유사한 위치에 자리한 텔레비전을 보며 소파에서 뒹굴다 잠든다. 홀로 있기 위해서도, 함께 관심을 나누기 위해서도 별도의 공간이 절실해진다. 관계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하게 자신을 가리고 숨을 공간도 필요해졌다. 겪어 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공간의 허기는 도시에 사는 이들 대부분이 느끼는 속내다. 그러나 거주지는 만만하게 옮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사람이 밖으로 나가는 게 자연스럽다. 모두가 원하는 익명의 공간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대안을 찾게 마련이다.
차량 위주의 도시 설계와 주거 지역과 상권이 분리된 도시는 사람들의 사는 방식마저 바꾸어 놓았다. 즐거웠던 기억을 복원시켜 주기 위한 자생적 노력은 새로운 공간의 제안으로 실마리를 풀었다. 한때 유행했던 도심의 아케이드가 규모를 키우고 기능을 더해 스타필드로 이어진 느낌 이다. 일상의 삶을 다 담을 수 있는 복합 공간의 탄생이다. 도시의 현재를 정확하게 파악한 민간 기업의 대처는 적절했다.
이 공간의 의미화가 중요하다. 쇼핑몰로 이름 붙이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가 된다. 도시 생활의 낭만과 문화까지 남는 그릇으로서의 공간이라면 또 다른 이름이 필요해진다. 스타필드(Starfield), 스타필드가 이런 의미를 담는 대명사가 돼도 좋겠다. 먼저 제안해 많은 사람이 호응하고 불러 주면 이름은 고정되는 법이다.
스타필드의 공간 기획자는 우리의 주거 환경이 서로를 어떻게 단절시키는지 정확하게 읽었다.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공간은 형태를 걷어 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 안에 들어서면 좀 더 느리게 행동해도, 하릴 없이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의 압축이 미덕인 시대에 조금 느슨해지고 여여유의 시간을 보내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뜻한 느낌과 긴밀함을 강조하기 위해 조명의 밝기와 색 온도까지 고려한 분위기로 실내를 채웠다. 활기 넘치는 공간의 곳곳에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카페가 많다. 물건을 사러 왔지만 얼굴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하자는 것이다. 새로운 장소가 생겼을 뿐인데 그 안에선 생각보다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같은 값이면 더 좋고 아름다운 걸 갖고 싶고, 보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 건 당연하다. 인터넷에서 비롯된 정보 격차의 줄어듦이 준 혜택이다. 스마트폰으로 그 격차는 더욱 줄어들어 같은 내용을 모두 알게 된다. 감정과 체험마저 공유되는 시대다. 게다가 해외여행의 경험이 늘면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다. 멋진 건축과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공간에 머물며 생기는 충족감을 경험했다. 멋진 장소의 기대를 스타필드가 앞서 제시하고 체험하게 해 주었다. 더 멀리 보고 느리게 걷게 만들어 머무르게 한 장치의 공감이다. 열광적 반응은 당연할지 모른다.
새로 만들어진 쇼핑몰 가운데에 이런 개념의 큰 건물은 지금껏 없었던 것 같다. 불특정 다수를 위한 공간 모델은 엄청난 이용객의 수로 성공을 입증했다. 스타필드의 실험은 계속이어질 것이다. 계속 늘려 갈 계획이고, 이미 세 곳이 만들어졌다. 벌써 중국 후난성 창사엔 스타필드의 로고까지 그대로 베낀 짝퉁 쇼핑몰이 생겼다. 잽싼 행보가 놀라울 뿐이다. 중국인도 멀리 있는 미국 사례보다 가까운 스타필드 모델이 자기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발 주자가 그대로 따라하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 이왕이면 스타필드가 멋진 공간을 제시하고, 또 그 다음을 채워 가면서 전 세계가 공감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윤광준 / ‘내가 사랑한 공간들’중에서
'미술 . 문화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뮤지엄 산 (0) | 2020.01.18 |
---|---|
아모레퍼시픽 사옥/미술관 (0) | 2020.01.17 |
천년의 화가, 김홍도 (0) | 2019.12.23 |
각시붓꽃 (0) | 2019.02.19 |
쉰들러 리스트 (0) | 2019.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