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먹방이 슬프다
마을마다 ‘배고픈 다리’가 있었다. 다리 가운데가 파여서 그리 불렸다. 지금은 사라져 지명으로만 남아있지만 옛날에는 흔했다. 허기져서 배가 홀쭉해진 사람에게는 움푹 꺼진 다리조차도 배가 고파 보였을 것이다. 배고픈 사람들이 짐을 지고 배고픈 다리를 건너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아프다.
지금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나온 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허기를 면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시대만 해도 두 끼만 먹었다. 점심(點心)은 그야말로 좁쌀 한 움큼이나 미역 몇 조각을 씹어서 ‘마음에 점을 찍었다’고 한다. 백성들의 굶주림은 일상이었다. 배 터지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고향을 떠나올 때를 회상하면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이 떠오른다. 타향살이는 누구에게나 두려웠다. 먼 길 떠나는 아들을 먹이려 어머니는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밥을 했다. 잡곡이 섞이지 않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쌀밥! 아버지도 드시지 못했던, 귀신에게나 올렸던 순백의 쌀밥! 아들은 목이 메어 몇 술 뜨다가 숟가락을 놓았다. 그러면 어머니는 숟가락을 다시 쥐여주며 말했다. “다 먹어야 한다. 밥이 힘이다. 사는 게 다 밥이여. 밥 굶는 놈이 제일 불쌍하다.”
어머니가 차린 밥을 먹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객지에서도 굶지 말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만나 밥을 먹자는 다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밥 한 끼 먹여 보내는 일은 거룩했다. 밥그릇 속에는 형용 못할 소중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밥 한 끼 못해 먹였(드렸)다”는 섭섭하고도 서러운 말이었다.
거의 모든 종교는 음식을 앞에 두고 기도를 드린다. 우선 하늘이 내린 축복, 땅의 자비, 농부의 정성에 두 손을 모은다. 양식에 스며있는 태양과 달과 별, 그리고 바람과 비에게도 고개를 숙인다. 마지막에는 음식이 되어준 생명들에게 경배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을 설했다. 음식이 되어준 생명들도 하늘의 일부인 만큼 음식을 먹는 행위는 바로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 셈이다. 하늘인 내가 다른 하늘을 먹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 ‘밥을 먹는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나와 이 세계의 신성(神聖)을 깨닫게 한다. ‘먹는 나도 하늘님이고, 먹고 있는 존재도 하늘님이라는’ 위대한 사유가 내 이 사이에서 톡톡 터지는 생생한 순간을 맞는다. 한 끼 밥을 대하는 태도가 나를 대하는 태도, 내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밥을 정성스럽게 먹는 행위는 나를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이고, 내 삶을 정성스럽게 창조하는 일이다.”(김혜련 <밥하는 시간>)
먹는 행위는 이렇듯 중하다. 그래서 먹을 때는 먹는 것에 집중하여야 한다. 한입씩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먹으면 음식처럼 귀한 것이 없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하게 삼키면 고마움이 침 속에 고인다. 아무렇게나 먹으면 음식 속의 생명들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고, 결국 스스로의 존엄도 내려놓는 것이다.
현대인은 지금 어느 때보다 굵은 허리로 뒤뚱거리고 있다. 우리나라 성인 3명 중 1명은 비만이라고 한다. 살이 찌는 것은 소비량보다 섭취량이 많기 때문이다. 군살 속에는 걸신(乞神)이 붙어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으라 유혹한다. 방송과 인터넷에도 걸신이 들어있다. 바로 ‘먹방’이다. 먹방을 달리 표현해보면 ‘먹는 굿’이다. 유튜브에서도 씹고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다. 작은 입 속에 온갖 먹거리를 밀어 넣는다. 지상파 방송마저 먹는 굿판을 벌이고 있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흡사 먹자골목에 들어선 느낌을 받는다.
정부가 비만관리 종합대책을 내놓으면서 아주 조심스레 먹방 규제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폭식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자 곧바로 역풍이 불었다. 정부가 먹는 것까지 간섭하느냐며 들고일어났다. 국가가 먹는 데 보태준 것이 있냐는 항변이었다. 정부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왜 먹방에 몰입할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뉴스를 보면 짜증이 나고, 드라마는 동떨어진 얘기라서 황당할 뿐이다. 불손하고 불순하다. 하지만 먹방은 단순하다. 원초적인 욕구가 있을 뿐 어떤 고민이나 복선도 없다. 꼴 보기 싫은 것들아, 고상한 척하지 마라. 먹방 속으로 들어가 우리는 함께 흡입한다.’
젊은이들에게 ‘천천히 씹어 공손히 삼키라’고 말하면 눈을 흘길 것이다. 그들은 바쁘고 또 바쁘다. 그렇다고 먹는 음식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삼킨 음식이 나를 만든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30대 남성의 허리가 가장 굵다. 2명 중 한 명이 비만이라고 한다. 그들의 밥그릇에 혹시 분노, 설움, 좌절이 담겨있지 않을까. 뒤뚱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자꾸 먹방이 어른거린다. 먹방이 즐거운가? 나는 슬프다.
김택근 / 시인 작가
(2019.11.9 경향신문)
아무리 먹어도 배고파하는 한국적 자본주의…
주범은 국가·재벌·개신교
사회학자인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는 <에리식톤 콤플렉스>에서 한국적 자본주의의 정신·본질을 사회학·계보학적으로 분석한다. 그가 분석해낸 한국 자본주의 정신은 다름 아닌 ‘에리식톤 콤플렉스’다. “천민자본주의란 개념도 있지만 에리식톤 콤플렉스야말로 한국적 근대와 자본주의의 정신·본질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학술적 개념”으로 본다.
에리식톤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껴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다. 김 교수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세계 10대 경제대국임에도 돈과 물질적 재화를 향한 끝없는 욕망으로 여전히 배고파한다. 그렇다면 돈과 물질적 재화에 대한 무한한 욕망으로 구축된 한국 자본주의 정신인 에리식톤 콤플렉스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됐을까.
책은 주범으로 국가, 재벌, 개신교를 꼽는다. 박정희 정권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개인에게 돈과 물질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자극해 에리식톤 콤플렉스를 주조했고, 정주영으로 상징되는 재벌들이 기업적 차원에서 확장·구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조용기로 대표되는 개신교가 에리식톤 콤플렉스를 신과 신앙의 이름으로 성화(聖化)했다. 특히 에리식톤 콤플렉스 전도사로 활약한 개신교는 스스로도 이를 내면화, 물질적인 교회성장을 이룩했다.
돈과 물질적 재화에 대한 채워지지 않을 허기를 달랠 진정한 자본주의, 자본주의 정신은 어떻게 가능할까. 저자는 국가와 재벌의 ‘동맹자본주의’의 해체, 전통적 집단주의 정신의 근대적 개인주의 정신으로의 대체, 개신교의 자본주의 주술사 노릇 청산과 영혼의 구원 등 본연의 임무 수행을 제시한다.
도재기 / 선임기자
(2019.11.9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