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
어느 날의 오후, 햇살이 참 좋다. 어제 그렇게 추웠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 잠깐의 따스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밤의 추위에 밀리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날이 좋은 오후엔 괜히 더 울적할 때가 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바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모두가 바쁘게 흘러가는데 나는 좋은 햇살을 벗 삼아 그저 걷는구나, 정처없이,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목적지 없는 산책. 좋은 햇살. 바쁘게 흘러가는 사람들.
‘어디로 가야할까’
갈 곳이 명확하지 않다는 건 슬픈 일이다.
다음 발걸음을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할지 늘 고민해야 하니까.
날이 이렇게 좋다면 더 슬프다.
‘날이 이렇게 좋은데 갈 곳 하나 없는 처지라니’
가끔 좋은 것들은 날 더 슬프게 만들기도 한다.
꼭 좋은 게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날이 좋아서 외로울 수도 있는 것처럼.
큰 그릇, 작은 그릇
그릇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다고 하지. 그래서 사람을 간혹 그릇에 비유하곤 하잖아. 많은 걸 담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그릇이 크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속이 좁아 보이는 사람은 ‘그릇이 작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하지만 우리네 삶에 그릇이라는 게 크기로만 가치가 정해지던가. 아주 작아도 우리 삶을 촉촉이 적셔주는 술 한 잔 담아주는 작은 그릇은 그대로 의미가 있고, 큰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닐 때도 있잖아.
그런 거야. 삶이란 크기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에 의미가 정해진다는 것. 얼마나 담는가보다 무엇을 담느냐. 그것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나는 그러기에 굳이 세간의 기준에 맞추어 그릇이 크다고 해본 적 없어. 난 작은 그릇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만 담겠어. 그것이 혹시 너무 작고 사소하다면, 난 말하겠어.
작고, 사소해서, 사랑했다고.
김해찬 / ‘너는 사랑을 잘못 배웠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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