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박 넝쿨

송담(松潭) 2018. 11. 12. 17:10

 

박 넝쿨

 

박 넝쿨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내가 태어난 집은 횡성의 작은 초가집이었다. 장작을 지피지 못해 구들장은 싸늘해도, 노랗고 동그란 초가지붕은 늘 안온했다. 어느 날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갈아 덮는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썩은 지붕을 걷어 내리고 슬레이트를 석가래 위로 올리면서 지긋지긋한 가난을 털어내려 했다. 순식간에 초가집초라한 집의 표상이 되었다. 초가지붕이 걷히자 지붕위에서 자라던 하얀 박과 박 넝쿨도 사라졌다.

 

 다른 꽃들과는 달리 박꽃은 저녁에 피어 새벽이슬 속에 시든다. 하필이면 박꽃은 왜 저녁에 필까 의문이 들지만, 가난한 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려면 밤에 피어야 정상이다. 어둠을 장식해야하기 때문이다. 박꽃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피는 꽃이다. 흥부네 집에서도 박은 초가지붕을 타고 자랐을 거고, 밤에 꽃을 피웠을 것이다.

 

 세상 어느 나라 사람들이 지붕에다 밭처럼 작물을 심어서 생산 공간을 만들었을까? 박을 지붕에 올리던 가난한 아버지는 완상과 실용성의 마술사였다. 박을 타고 삶아서 공예와 실용의 그릇을 만들 때 어머니는 예술가였다. 초가에 사는 사람들은 지붕에서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박 덩이들을 쳐다보면서 흥부의 박을 생각했다. 혹시 저 중에 하나라도 흥부의 박이 있으려니하며 서리 내리는 날을 기다렸다. 가난이 꾸는 희망이 그 초가지붕 박 넝쿨에 주렁주렁 자라고 있었다.

 

 서리가 내리고 박 넝쿨이 마르면 온 식구가 동원되어 박을 따 내렸다. 물론 아버지가 지붕위로 올라가고 식구들이 처마 밑으로 모여서 박을 받았다. 그리고는 슬근슬근 톱질을 해서 반으로 잘라 가마솥에 넣고 삶았다. 모든 열매는 그 속에 그 값어치를 간직한다. 그러나 박은 그 반대로 속을 다 긁어내고 빈껍데기만 남게 될 때 비로소 제 구실을 한다. 그야말로 박의 역설이다. 박은 열매 속을 다 도려내고 빈껍데기만 남았을 대 비로소 그 용처가 밝혀진다. ()보다 허(), 이것이 박의 미학이다.

 

 빈 지붕에 보름달처럼 매달려 하늘을 가득 채웠던 박, 어둠 속에서 피고 햇살에 사그러지던 꽃, 연하디 연한 하얀 몸을 펄펄 끓은 물에 공궤하고 얻어낸 단단한 골격, 한 가지 용도를 주장하지 않고 두레박, 됫박, 종지, 사발, 술잔, 탈바가지, 똥바가지가 되어 가난한 삶을 위무했던 박, 박꽃, 박 넝쿨, 박 넝쿨을 머리에 인 초가집은 지금 어디 있는가.

 

 

허태수 / ‘내 생각에 답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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