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삶이라는 단 하나의 시

송담(松潭) 2019. 1. 19. 05:52

 

삶이라는 단 하나의 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시 속에 빠져 사는 올해 환갑이 된 아줌마입니다.

소녀 시절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것을 멀리서 바라만 봐도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누가 볼세라 몰래 숨어 있었습니다.

시를 좀 더 잘 이해하고, 그리고 나도 좋아하는 시를 한번 써보고 싶어서

눈이 침침할 때가 돼서야 검정고시로 중·고 과정을 거쳐

작년에 통신대학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시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웠습니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어떻게 시를 이해하며 읽고 써야 할지

늦깎이로 배우는 학생은 고민입니다.

 

 

 오늘은 출근길에 골목에 떨어져 있는 은행잎을 하나 주웠습니다. 가을이다 싶어서 올해의 첫 가을을 기억하고 싶어서 책갈피에 꽂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매번 돌아오는 가을인데도 왜 매번 돌아오는 가을은 그전의 가을이 아니라 새로운 가을처럼 느껴질까요. 계절이 돌아와도 이미 나는 그 계절의 나일 수는 없어서겠죠. 인간은 늙어감 속에서 점차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든 새로워지고 있구나. 새로워지는 늙음이란 것을 깨닫기 위해 책갈피에 놓아두는 낙엽은 얼마나 생기로운 산물일까요.

 

 퇴근길 버스정류장에선 옛날에 헤어진 사람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습니다. 누구에게나 잊을 만하면 떠오르고, 잊었다 싶으면 생각나는 얼굴이 있죠. 그런 얼굴 하나쯤 가슴에 담아두어도 좀처럼 이상하지 않은 순간, 밤이지요. 밤에 내 마음인데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마주하면 괜스레 더 조용해져서 버스 차창에 머리를 대고 꼭 이런 혼잣말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을 맞이하는 자세란 게 있을까요? 어떤 이는 그 마음이야말로 창작의 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니 그런 마음이 빈번히 찾아오는 사람은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세상에 시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시는 곳곳에 있고, 우리가 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사연은 얼마나 통째로 시적인가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새로운 시작을 하는 당신(무언가를 시작하기에 걸맞은 나이란 사실 없지만요), 소녀 시절 친구들의 교복 입은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당신, 침침한 눈으로 시를 쓰는 당신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듯 보이 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당신이지요. 그런 사람이 쓰는 시는 다른 모든 시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시일 겁니다.

 

 내일은 저도 시를 한편 쓰려고 합니다. 눈이 침침한 소녀가 등장하는 시를요. 그 소녀는 조약돌을 주워 마음이라고 일컫습니다. 마음을 외투 호주머니에 넣고 굴리고 굴리면서 슬픔의 눈보라를 뚫고 나아가지요. 이러한 시에 제목을 뭐라고 달면 좋을까요?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 2 >

 

 잘 살아보겠다고 혼자 상경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 긴 시간 동안 서울에서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어 마음이 늘 외롭습니다. 일을 마치고 텅 빈 자취방에 들어가면 나를 반겨주는 건 고요한 정적뿐입니다. 허한 마음에 냉장고를 열면 엄마가 보내주신 반찬들이 가득한데 왠지 입맛이 없어 다시 문을 닫곤 해요. 분명 열심히 살고 있다고는 느끼는데 마음이 힘들어요. 이런 저에게 처방전이 필요합니다.

 

 

동유럽 종단열차 / 이병률

 

왜 혼자냐고 합니다

노부부가 호밀빵 반절을 건네며

내게 혼자여서 쓸쓸하겠다 합니다

씩씩하게 빵을 베어물며

쓸쓸함이 차창 밖 벌판에 쌓인 눈만큼이야 되겠냐싶어집니다

국경을 앞둔 루마니아 어느 작은 마을

노부부는 내리고 나는 잠이 듭니다

 

눈을 뜨니 바깥에는 눈보라 치는 벌판이

맞은편에는 동양 사내가 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긴긴 밤 말도 않던 사내가 아침이 되어서야

자신은 베트남 사람인데 나더러 일본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을 뿐 그에게 왜 혼자냐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어디를 가느냐 물으려다 가늠할 방향이 아닌 듯해 소란을 덮어둡니다

큰 햇살이 마중나와 있는 역으로

사내는 사라지고 나는 잠이 듭니다

 

매서운 바람에 차창은 얼고 풍경은 닫히고

달려도 달려도 시간의 몸은 극치를 향해 있습니다

바르샤바로 가려면 이 칸에 있고

프라하로 가려 면 앞 칸으로 가라고 차장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로든 가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든 지나가도 됩니다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고 있기에

 

 

고요와 냉장 사이

 

 우리의 생활은, 삶은 텅 빈 정적과 꽉 찬 냉장고 사이를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나름의 생활 철학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밥상 앞에 앉아 음식들과 대화하며 즐겁게 밥을 먹는 법을 배웠다고 하면 이상할까요? 웃길까요?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던 때를 떠올려봅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살았지만, 남들처럼 살지 못해 첫 실업급여를 받았을 때였습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묵호까지 가는 밤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혼자에 기대어 간다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 맥주 여러 캔을 벌컥벌컥 마시고 차창 밖의 검은 고요를 즐길 새도 없이 쓰려져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눈을 뜨니 텅 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지요. 처음으로 혼자 고깃집에 갔던 날도 기억납니다, 호기롭게 들어가 돼지갈비 2인분을 구워먹고 집으로 와서는 까스 활명수를 찾았습니다. 처음으로 혼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처음으로 혼자 극장에 갔을 때, 처음으로 혼자 사랑에 빠졌을 때, 처음으로 혼자 울었을 때를 되돌아보면 나는, 우리는 혼자 참으로 많은 일을 해내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혼자를 혼자 두지 않는 씩씩한 사람으로 자라나 우는 자신의 등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게 아닐까요.

 

 사랑도, 우정도 모두 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 등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어느새 혼자서도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되지 않나요. 비록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어디선가 혼자는 혼자를 만납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기대며 사는 존재라지만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 수 없지요. 월급날 나를 위해 굽는 소고기나 나를 위해 사주는 구두, 나를 위해 읽는 책 한권이 나의 한 달을 튼튼하게 떠받친다는 건 명쾌한 사실이지요. “분명 열심히 살고 있다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차근차근 혼자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랍니다. 쓸쓸하게 씩씩하게.

 

 

  김현 /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중에서

'아름다운 詩,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신의 외로운 눈을 바라보아야 하는 저녁   (0) 2019.03.12
자이언트  (0) 2019.02.20
어느 오후  (0) 2019.01.18
박 넝쿨  (0) 2018.11.12
인디언 기우제와 첫눈  (0) 2018.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