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자신의 외로운 눈을 바라보아야 하는 저녁

송담(松潭) 2019. 3. 12. 21:53

자신의 외로운 눈을 바라보아야 하는 저녁

 

 

 

 사람은 늙어가면 추억의 속도로 부푼다는 말이 있다.

 요즘 웬일인지 어린 날의 기억이 많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두 가지 기억이 줄곧 머릿속을 맴돈다. 사실 기억이라는 것이 내가 아직 머물고 있는 풍경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요즘 내 기억이 머물고 있는 그 풍경에 대해 유난히 쓸쓸해지고는 하는 것 같다.


 학교에서 늦은 청소를 끝내고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왜 그렇게 멀던지, 친한 동무들이 의리 없이 자기들끼리 훌쩍 떠나버리고 어쩌다 숙제를 못해 화장실 청소라도 걸린 날이면 더욱 그랬다. 냄새나는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선생님께 보고하고 나면 학교는 텅 비어 있었다.


 하오의 햇살만이 가득한 운동장엔 누가 떨어뜨리고 간 것일까, 흰 운동모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배가 고파서 애꿎은 수돗물만 꿀꺽꿀꺽 들이키곤 했었지, 수돗물에서는 언제나 생선 비린내 같은 소독 냄새가 났다.


 수돗물로 배를 불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골목길에 서면 아아, 집으로 가는 길은 까마득히 멀리로만 보였다. 그럴 때면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예쁘장한 돌 하나를 친구 삼아 골라 들곤 했었지, 그리고는 그 돌멩이를 발로 툭툭 차면서 집으로 향했다. 어쩌다 하수구를 만나면 이 귀여운 돌멩이 친구를 그 속에 빠뜨려 잃어버릴까 조심조심하면서......


 그러다가 마침내 집 앞 골목에 이르면 길동무해준 돌멩이와 미련 없이 이별했다. 그러면 돌멩이 친구는 내게 잘 있으라는 작별 인사도 없이 저 혼자 돌담길 한구석에 가만히 앉곤 했다. 지금도 생각난다. 떨어진 운동화 짝을 질질 끌면서 너무 멀리 차버리면 행여 잃어버릴까 조심조심 돌멩이를 툭툭 차면서 걸어오던 하굣길, 그 마른 포도 위를 구르던 돌멩이의 금속성 소리, 땅을 내려다보면서 걷던 쓸쓸한 그 어린 날의 고독감.


 어릴 때의 기억은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저녁밥을 먹으면 반바지를 입고 나와 옛날 정동의 MBC 앞에 있던 로터리에 앉아서 밤이 깊을 때까지 오가는 차의 숫자를 세고는 했다. 그것이 어린 날 내 즐거움이었다. 그 당시 로터리에는 자그마한 풀밭이 있었는데, 나는 그 풀밭 위에 앉아서 오가는 차의 숫자를 소리 내서 외우곤 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내 대, 다섯 대.......

 지금의 교통량이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그 어린 시절에는 드문드문 차가 다니곤 했다. 주로 군용차나 관용차 같은 지프차가 대부분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차들의 숫자를 세는 것을 공연히 즐기곤 했다.

 나는 꼬박 삼백 대를 헤아리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돌비석 깎는 옆집의 젊은 인부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가 우물 옆 골목에서 들려왔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내 동무 어데 두고

나 홀로 앉아서


 그땐 왜 그리 슬펐던지, 공연히 눈물이 나와 천장에 날아다니는 파리 죽으라고 누런 끈끈이를 매달아놓은 구멍가게 알전구의 불빛이 눈물에 젖어 끈적끈적 묻어나곤 했다.

 요즘 나는 저녁이면 거실에 나와 앉는다. 파이프를 꺼내 물고 창가에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본다.

 저녁이 다가오면 쓸쓸해지는 짐승은 인간만이 아니라고 한다. 저녁이 오면, 대자연의 모든 식물과 짐승들의 눈빛이 순해지고 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고 한다. 이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자신의 외로운 그 눈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최인호 / ‘인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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