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기가 뇌를 바꾸다
흔히들 ‘디지털 치매’ 많이 얘기하시죠? 디지털 기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기능이 저하되고 치매에 걸리는 것 아닌지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음 체크리스트를 한번 살펴보시죠.
1. 외우는 전화번호가 회사 번호와 집 번호뿐이다.
2. 전날 먹은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다.
3. 주변 사람과의 대화 중 80퍼센트는 이메일로 한다.
4. 계산서에 서명할 때 빼고는 거의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는다.
5.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전에 만났던 사람인 적이 있다.
6. 자꾸 같은 얘기를 한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7. 자동차 내비게이션 장치를 장착한 뒤 지도를 보지 않는다.
8. 몇 년째 사용하고 있는 집 전화번호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은 적이 있다.
9. 아는 한자나 영어 단어가 기억나지 않은 적이 있다.
10. 애창곡의 가사를 보지 않으면 노래를 부를 수 없다.
이 체크리스트를 자세히 보시면 디지털 치매를 진단하는 항목 대부분이 기억력 중심입니다. 노래방 화면에 가사가 다 나오니까 가사를 외울 필요도 없고, 스마트폰 안에 주소록이 있으니까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책을 읽으면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쳐두었지만 그걸 다시 꺼내서 보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집에 가서 책을 꺼내 페이지를 펴는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하니까요. 지금은 웬만한 정보는 바로 검색해 찾아보기 때문에 외울 필요도 없고, 다음에 필요하면 그때 다시 검색하면 됩니다. 컴퓨터가 내 손에 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대부분의 정보를 이젠 외울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변화입니다.
인터넷 때문에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맞지만, 인터넷 혹은 스마트기기 때문에 우리가 전보다 뇌를 더 적게 쓴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뇌를 쓰고 있을 뿐, 예전보다 뇌를 적게 써서 바보가 되거나 인지기능이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젊은 세대만 보더라도 책을 꼼꼼히 한 줄씩 읽는 방식의 정보습득 태도가 거의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책을 순서대로 읽지 않고 필요하면 되돌아가서 봅니다. 검색과 편집 중심의 사고를 하고 빠르게 정보 모드를 전환합니다. 글을 읽다가 갑자기 영상을 보고 다시 글을 읽고 하이퍼링크를 통해 파편화된 정보를 빠르게 섭렵합니다. 좋다 싫다 혹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를 떠나서, 미디어 때문에 그런 방식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대뇌 안쪽 측두엽 근처 해마(hippocampus)라는 영역을 많이 사용했을 겁니다. 이 영역이 발달하면 머리가 좋은 사람 취급을 받았겠지요. 그런데 현대사회에 와서는 전두엽, 즉 정보를 빠르게 스캐닝 하고 필요한 정보가 뭔지 찾아서 결합하고 신속하게 맥락을 이해하는 영역을 더 많이 쓰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뇌를 쓰는 방식이 바뀌면 뇌 구조도 달라집니다. 이것을 ‘뇌 가소성(neural plasticity)’이라고 부릅니다. 뇌 구조가 바뀌어야 새로운 기능이 더해질 수 있으니까요. 새로운 사고방식, 검색과 편집, 정보의 결합, 빠른 스캔을 위해서는 그에 적절하게 뇌 구조가 바뀌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정재승 / ‘열 두 발자국’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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