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에서 움튼 만만평등의 꿈
변산반도가 조정 쪽 보고서에 ‘토벌이 어렵다’고 할 정도로 도적들의 본거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혜의 요새적 지형이 큰 몫을 했다. 강물과 바다, 그리고 줄포만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데다가(요즘은 간척을 해서 지형이 변했다) 대략 300여 개에 달하는 산봉우리들이 각기 솟아있어서 미로와 같은 지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변산반도를 두고 ‘양의 내장과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미로와 같이 길이 복잡하다는 얘기다. 관군이 도적떼들을 잡기 위해 변산에 들어와도 어디가 어딘지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변산반도주변에는 포구들이 많다. 내가 지금까지 찾아본 것을 헤아리면 대략20개가 넘는다, 20여 개의 포구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고 유사시에는 쫓기는 자들이 그 배를 타고 서해로 탈출할 수 있었다.
변산 앞바다에는 서해쪽으로 한 시간정도만 가면 위도가 있고, 약간 북쪽으로는 고군산군도가 포진해 있고, 남쪽으로는 전남 영광의 섬들이 즐비하다. 영광 쪽의 섬들은 옛날부터 황금어장소리를 들어온 조기의 산지다. 가장 풍성한바다였다. 영광 밑으로 내려가면 신안의 수백 개 섬들이 흩어져 있다. 무인도까지 합하면 1,000개가 넘는 섬들이다.
만약 관군들이 잡으러오면 배를 타고 이들 서해의 섬으로 도망가면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변산반도 가로 세로 80리 이내 에는 산과 들판, 바다가 있었으므로 먹을거리 걱정은 적었다. 산에서 산나물이 나오고 들판에서 곡식이 나오고 바다에서 생선이 나왔다. 특히 서해안의 뻘밭에는 조개 등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다. 굶어죽을 염려가 적었다고 할까.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십승지(十勝地)가 있다. 난리가 났을 때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숨어 살 수 있는 지형을 갖춘 곳이다. 변산반도는 이러한 십승지에 당연히 포함되었다. ‘양백지간’이 제도권의 십승지 1번지라고 한다면, 변산반도는 비제도권, 즉 불법체류자들에게 최적의 1번지가 아니었나 싶다. 조선시대의 불법체류자라고 한다면 노비와 도적들이다. 노비들이 도망가서 살 수 있었던 곳, ‘추노(推奴)꾼’들을 피해서 생존이 가능했던 곳이 바로 변산이었다.
(...생략...)
변산반도라는 한반도 최고의 요새 지형에 숨어든 사람들은 다름 아닌 노비들이었다. 노비들이 자유를 찾아 이곳으로 도망 온 것이다. 노비가 누구인가? 조선의 노예들이다.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노예들이다. 미국의 흑인 노예와 같은 처지였지만 나라가 다르고 피부색도 조금씩 다른 흑인에 비해 조선의 노비들은 피부색도 같고 말씨도 같고 식성도 같았다.
조선시대 인구 구성비에서 노비의 비율이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조선 중기까지 대략 인구의 30% 정도로 추정된다. 10명 중에 3명은 노예였다는 말이다. 노비를 사고판 기록들을 보면 여자노비가 비쌌다. 힘을 쓰는 남자 청년 노비보다 20세 전후의 여자 노비가 높은 몸값으로 매매되었다. 아마도 미모가 있었다면 훨씬 더 비싸게 팔렸을 것이다.
노비를 사고팔 때는 가족단위 매매가 많았다. 노비와 그 엄마·형제자매를 굴비처럼 묶어 사고팔았다.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서너 명의 가족이 한꺼번에 도망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만약 한 명이 도망가면 나머지 가족들은 인질 노릇을 하게 되므로 쉽게 도망갈 생각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 이후로 넘어오면서 도망가는 노비가 증가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에는 노비 도망이 하나의 트렌드가 될 정도로 노비 엑소더스(대탈출)가 커다란 사회문제였다. 전쟁을 겪고 나면 사회 시스템이 붕괴되거나 흔들린다. 임진왜란 때 한양(서울)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자 가장 먼저 발생한 사건이 노비문서를 보관하고 있던 기관인 ‘장예원掌隷院’의 화재였다.
전쟁 났을 때 가장 먼저 발생하는 사건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 사회에서 가장 큰 불만과 원성이 많았던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한양의 노비문서를 보관한 장예원이 가장 먼저 불탔다는 사실은 한양 노비들이 자신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직접 가서 불을 질렀을 확률이 높다. 당대 최고의 민원사항이었던 셈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로 사회체제가 느슨해지고 사회 경제적 변화가 오면서 전국의 노비들이 자유를 찾아 이 골 저 골로 아니면 바닷가 후미진 섬으로 도망을 갔다. 노비를 잡아다주고 돈을 받는 추노꾼들이 직업으로 등장했다. 추노꾼의 비싼 품삯을 대기 어려운 사람들은 주인이 직접 노비를 잡으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노비의 연고를 찾아 나섰으며, 전국의 오일장을 돌아다니며 입소문을 수집했다. 그러다가 노비한테 맞아죽는 수도 있었다고 한다. 잡으러온 옛 주인을 노비가 선제공격 하는 것이다. 쫓는 추노꾼과 쫓기는 노비들과의 혈전도 많았다. 추노꾼을 하려면 주먹이나 무술능력이 있어야만 했다. 10년 전 즈음 재미있게 본 텔레비전 연속극 〈추노)가 바로 이러한 시대배경을 가지고 제작된 드라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 전국의 노비들 사이에서 ‘어디로 가면 잡히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소문난 곳이 아마도 변산반도였던 듯싶다. 중국 후난성의 도적 소굴 장가계나 터키의 지하동굴 도시 데린쿠유의 역할을 한 곳이 변산반도였다.
변산으로 모여든 노비들에게는 사상적인 중심이 있었다. 도적이나 반란세력이 조직화되고 세력을 유지하려면 신념 체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신념은 요즘 식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성격도 있고 종교적인 신앙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 이데올로기와 종교 신앙이 합쳐진 것이 바로 미륵불이다. 미륵불(彌勒佛), 조선시대 주자학의 반대는 미륵불이었다. 주자학이 양백지간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조선왕조체제를 유지하는 국교國教였다면, 미륵불은 이 주자학을 흔드는 사상, 신앙체계였다. 먼지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하면 양반.상놈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그것이 용화회상龍苹會上이다. 용화회상은 만민평등의 세상을 가리킨다. 인간 주자와 부처님인 미륵이 붙으면 누가 이기겠는가. 당연히 미륵이 이긴다.
彌勒(미륵)을 파자하면 이(爾), 활(弓)로 힘(力) 키워 서 바꾸자(革)가 된다, 이 해석은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초반에 들은 이야기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찍이 좌파에 투신해 고려공산당 초대 당수를 지냈던 김철수(金綴洙, 1893-1986년)에게서 들었다. 그는 말년에 춥고 배고팠다. 배가 고프면 광주 무등산의 지기(知己) 허백련이 살던 춘설헌(春雪軒)에 가서 추위를 녹이 곤 했다.
김철수의 경력은 김일성보다 앞선다. 공산당 짬밥에서 그렇다.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그를 애도하는 만장輓章을 써서 보낸 인물이 김철수다. 그는 마오쩌둥급 짬밥이었다. 김철수가 불교의 미륵을 이렇게 혁명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해석은 김철수 본인이 한 것도 아니다. 윗대 선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김철수의 고향은 전북 부안이다. 부안은 변산반도에 붙어 있는 지역이다. 미륵이 일제강점기 시절 좌파로 변신 했다고나 할까.
변산반도 노비들이 신봉하던 미륵불은 바로 선운사 마애불磨崖佛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선운사 대웅전에서 3킬로미터 정도 더 올라가면 도솔암이 나오고 도솔암 바위절벽에 거대하게 새겨진 부처님이 바로 변산반도 일대를 지배했던 미륵불의 모습이었다.
저수지가 가득하면 흉년은 없다
한반도의 지세는 동산서야東山四野다. 동쪽은 산이 많고 서쪽은 들판이 많다. 기차를 타고가다 보면 전남 장성에서부터 충남 논산까지는 중간 중간 야산을 빼면 거의 평야지대로 연결되어 있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이북도 그렇다. 북한 최대의 평야인 연백평야와 재령평야는 황해도에 있다. 전라도의 김제·만경 평야는 한반도 최대의 평야다.
이들 평야지대의 고대 신은 용(龍)이었다. 용이 비를 내리게 해주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쌀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쌀농사를 짓는 논(畓)은 물 밑에 밭이 있는 것이다. 모내기를 할 때 비가 오지 않으면 굶어죽는다. 비를 주관하는 우신雨神이 바로 용이라고 생각했다. 십이지十二支에서도 용을 상징하는 게 진辰이다. 진은 물이 섞인 질퍽질퍽한 흙에 해당한다. 모내기할 때 질퍽한 논이 진이다.
평야지대에서는 고대부터 농사용으로 커다란 저수지를 축조해놓았다. 전라도에는 3개의 거대 저수지가 있다. 황등제黃登堤, 눌제訥堤, 벽골제碧骨堤가 그것이다. 마한시대부터 백제 중기에 축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황등제 호수는 전북 익산 미륵산 밑에 있었다. 둘레가 70리(27.5킬로미터)에 해당했다. 익산 원광대 후문 뒤로 황등 가는 길에 ‘요교腰橋다리’라고 하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여기는 황등제의 입구였다. 병목처럼 좁은 지형이다. 허리 ‘요腰’ 자를 쓴 이유도 이 호수 입구가 잘록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구한말에 예언자 강증산姜甑山이 황등제 옆을 지나가면서 “앞으로 여기는 호수가 없어지고 농사짓는 땅이 되겠구나!"하고 예언을 했다. 황등제는 일제강점기 때 물을 빼며 논으로 바뀌었다. 백제 초기부터 존재했던 호수가 1,500년을 이어오다가 일제강점기 때 없어진 것이다.
충청도를 호서湖酉라고 하고 전라도를 호남湖南이라고 하는데, 호남의 지명 유래는 미륵산 밑에 있던 황등제가 기준이었다. 황등제 이남이 호남인 셈이다. 지금은 황등제가 논으로 바뀌고 호수가 없어 졌기 때문에 호남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황등제를 배 타고 건너가면 미륵산 자락 미륵사彌勒寺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백제 무왕 때 대대적인 국책사업으로 지은 절이 미륵사다. 일부 남아 있는 석탑의 크기만 보더라도 이 절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백제 미륵사는 황등제를 끼고 있는 절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벽골제 역시 거대한 저수지였는데 이 저수지 옆에 모악산 금산사金山寺가 자리 잡고 있다. 금산사 역시 진표 율사가 세운 미륵전으로 유명하다. 눌제는 전북 정읍시 고부면과 부안군 줄포면 사이에 있던 저수지다. 이 근처에 바로 변산반도 노비도적과 당취들의 신앙 대상이었던 선운사 미륵불이 있다. 조선시대의 학자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호남의 3대 저수지만 가동하면 흉년은 없다’고 기록했다.
공교롭게도 이 3대 호수 옆에는 미륵불을 모시는 사찰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호수는 용이 살던 곳이었다. 용이 비를 내리게 해서 농사를 짓게 한다는 신화 구조가 발견된다. 미륵사의 창건설화에도 용이 등장한다. 미륵사 터가 원래 용이 살던 늪지대였다. 용이 살던 곳에다가 미륵불을 모신 것이다. 금산사도 마찬가지다. 미륵전彌勒殿을 지을 때 숯으로 땅을 메웠다고 전해진다. 숯으로 메웠다는 것은 물이 있는 늪지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도 역시 용이 살던 곳이다.
선운사도 창건설화에 용이 살았던 곳이라고 나온다. 미륵계동 사찰은 공통적으로 용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옆에 거대한 저수지(호수)가 포진 있다는 공동점이 발견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불교의 미륵신앙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에는 평야지대의 농민들이 용을 신앙하다가 불교가 전래되면서 미륵으로 바뀌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용이 미륵으로 바뀐 셈이다. 둘 다 비를 내리게 해주는 수신水神. 또는 농사의 신 역할을 했다.
그런데 왜 미륵이 나중에 혁명의 부처로 변하게 되었을까? 수탈 때문이다. 농사를 지어봤자 권력자와 기득권층이 다 뜯어갔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체념하고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기가 농사지어 놓은 것을 눈앞에서 수탈당하면 분노가 치솟는다. 이거 때려 부숴야겠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경상도 양백지간의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반항심이 적었다. 원래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뺏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전라도의 변산반도 일대 평야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사정이 달랐다. 눈에서 천불이 솟았다. 농사지어 놓은 쌀을 빼앗아가는 권력층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부처님이 미륵불이었다.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나면 착취하던 놈들을 다 쓸어버리고 새 세상이 올 것으로 고대했다. 그래서 한국역사에서 전환기의 민중지도자들은 스스로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륵 계통의 사찰들이 레지스탕스(저항세력)의 거점 역할을 했다.
조선조에 미륵 계통의 사찰들이 특히 많이 폐사廢寺되었는데, 이 절들은 전라도 지역에 많이 있었다. 조선시대 반대세력의 은거지가 바로 미륵사찰들이었다는 말이다. 용이 미륵으로 바뀌고, 미륵이 혁명으로 바뀌었다.
‘조용헌의 인생독법’중에서
'교양· 상식. 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지털 기기가 뇌를 바꾸다 (0) | 2018.08.12 |
---|---|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0) | 2018.08.07 |
인간관계에서 한계 설정이 필요한 이유 (0) | 2018.05.03 |
왜 나는 사소한 일에도 자꾸만 화가 나는 걸까? (0) | 2018.04.29 |
원숭이가 찍은 사진, 저작권은 누가? (0) | 2018.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