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순간

송담(松潭) 2016. 8. 25. 16:21

 

 

순간

 

 

 

 눈을 뜨면 갓 뽑은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현생인류가 태어난 장소가 케냐와 에티오피아라는데, 매일 아침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나를 잠에서 깨우는 것도 에티오피아산 커피다. 동물에서 인간이 된 그 순간의 비밀이 이 커피에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따뜻하던 커피는 이내 식어버린다. 나도 언젠가는 이처럼 식어버릴 것이다.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지구도 50억 년이 지나면 자전할 힘을 잃고 멈출 것이라고 한다.

 

 이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우주의 원칙이 있다. 원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괴물에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만물을 삼켜버리는 괴물,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과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은 그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가버린 뒤, 결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은 그 흐름의 시작과 끝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쏜살 같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시간,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무방비 상태로 미래에 진입한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뿐이며,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시간의 흔적이다. 과거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20년 전이든, 20분 전이든 모두가 순간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이 교차하는 지점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둘의 공통분모인 사이, ()’을 포착해야 한다. 이것을 순간(瞬間)’이라고 한다. 순간이란 봄의 약동으로 싹이 트고 꽃망울이 터지는 그 찰나(刹那)의 시간이다. 봄이 약동하면 잎과 꽃망울은 모든 찰나에 과격하면서도 거칠게 제 모습을 바꾼다. 순간순간 식물들은 자신의 색깔과 자기 몸의 구조를 다채롭게 변화시킨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이 눈 깜짝할 사이를 또 다른 눈인 카메라 렌즈로 포착한다. 눈과 렌즈와 마음이 하나 되는 그 신비한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셔터를 누른다. 브레송은 이때를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카메라 렌즈라는 작지만 혁명적인 눈으로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에 진입해 그 유동적 흐름을 파괴하고 정지시킨다. 그럼으로써 흘러가는 일상은 거룩한 정지, 영원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정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포착하려는 부단한 연습을 통해 그것은 예술이 된다.

 

 플라톤은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시작을 여는 동력을 고대 그리스어로 엑사이프네스(exaiphnes)’라고 했다. 엑사이프네스는 흔히 갑자기/한순간에로 번역된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과 다르지 않다. 엑사이프네스의 시간은 우리의 타성과 게으름을 일깨우며 한곳에 의미 없이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러고는 그림자의 허상이 아닌 빛이 일깨우는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이런 자기변화는 모멘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혹시라도 지금 귀하고 소중한 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고 있다면, 고통이 따르더라도 이 순간에 집중해 자신만의 빛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 결정적인 순간이 삶을 좀 더 진실에 가깝게 해줄 것이다.

 

배철현/ ‘심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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