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우미양가
요즈음은 초등학교도 성적 평가를 수우미양가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말에 한결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이보다 더 멋지게 평가한 일이 세계에서도 없지 않을까 싶다.
분명 상대가 있으면 일등, 이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등수 속에서도 정말 멋진 여유를 남겼다.
수 秀 : 뛰어나다
우 優 : 넉넉하다
미 美 : 아름답다
양 良 : 좋다
가 可 : 옳다(그래도 됐다는 말)
이보다 더 좋은 평가가 어디 있겠는가. 가령 누가 꼴찌 가可를 받았다 하더라도 어느 면에 있어서는 수秀를 받은 자보다 나은 면이 분명코 있게 마련이다.
대개 일등하기를 좋아하는 이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 많다. 더 나아가면 간교하고 고집스럽고 소위 출세해서 정치가네 교수네 박사네 엘리트네 하는 자들 중에 오히려 이런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이 위에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병든다.
공부는 못해도 인정 많은 제자도 있다. 한비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부인이 자라를 한 마리 사서 집으로 가는 길에 강을 건너게 되었다. 강물을 보자 그 부인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놈의 자라가 얼마나 목이 마를까? 그 부인은 측은히 여겨 자라를 놓아 물을 마시게 했다. 그런데 물을 마시러 간 자라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식을 기르는 것이나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 자라를 물 먹이러 보내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끝없이 놓아 보내다 보면 분명 돌아오는 자가 있다. 몇 천에 한둘이지만 그래도 부모나 스승은 돌아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행여 내 자식은 그렇지 않으리라 하고 죽을힘을 다해 헌신을 다 바치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스승에겐 일등, 이등이 중요하지 않다. 돌아오는 한두 마리의 영광으로 그대도 함께 강으로 돌아가는 영광을 얻었다. 그 희유(稀有)한 반본(反本)에도 불구하고....
출세한 것은 그대의 총명함과 노력의 대가가 아니다. 장학금을 지급한 이름 모를 독지가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그대를 실어나른 버스운전사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모두 수秀를 받은 자가 아니다.
< 2 >
주자가 말씀하시기를 “먼저 받아들인 것이 주가 된다.先入爲主”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은 어차피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많이 배우고 체험한 자는 세상을 아름답다고 여기게 되고, 추하고 퇴폐적인 것을 많이 경험한 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믿지 못한다.
< 3 >
세상 사람들이 복, 복 말하나 마음 한가한 것보다 더한 복은 없다. 한가한 마음은 모든 비교가 끊어짐으로부터 나온다.
< 4 >
가을 창가에
밤공기가 선뜩선뜩 가슴을 적신다. 영롱한 별빛은 알알이 신비의 언어로 내 귓전에 소곤대고, 저 해맑은 조각달은 누가 잃어버린 보배인가! 교교한 은하의 물살엔 구절초의 향내가 묻어 있다.
적막한 이 밤, 온갖 벌레들이 내 창가에 와서 운다. 저마다의 악기를 가지고.
그대 없어도 오늘밤은 넉넉하다.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은 익어가고 내 마음의 호수에 영롱한 별빛이 드는 밤!
< 5 >
중생은 남의 말을 들어도 번뇌가 일어나고 내가 말을 해도 번뇌가 일어난다. 자기의 고착된 생각을 가지고 듣고 말하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무심(無心)함이 좋다. 구름같이 바람같이.
< 6 >
우리 대문 위족에는 내방객의 편의를 위해 걸어놓은 서산 김귀환이 써준 원정서사(元貞書舍) 현판이 있고, 조금 걸어 들어오면 정실현담(靜室玄談)이란 작은 목각 하나가 걸려 있다. 이건 나 스스로에게 이르는 말이다.
‘고요한 집에서 도란도란 진리를 나누리라.’
서울 어느 다방 이름이 ‘나는 정말정말 사람이 싫다. 그러나 참말이지 사람이 그립다’는 곳이 있다. 나도 어쩌면 말이 싫은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나친 세속의 이야기가 싫을 뿐.
봄볕 따스히 대지에 내리니
문자 없는 진리자字가 비단결에 깔렸구나.
권영훈 / ‘성현의 숲을 거닐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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