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아름다운 퇴장

송담(松潭) 2015. 12. 5. 13:00

 

 

아름다운 퇴장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경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선암사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그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을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뚝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들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들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에서

 

 

 

 인용이 길었지만, 도무지 이런 글은 줄일 재간이 없다. 그의 글에는 묘사조차 경구(警句)처럼 들리는 신이함이 있다. 사랑스러운 대상에게조차 거리를 두며, 거리를 두면서도 그 대상이 제 속으로만 느끼고 있을, 그리하여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속내조차 적확하게 드러내는, 오랜 숙련 끝에 얻어진 내공이 그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그는 따스하게 냉정하다.

 

 모호할 정도로 교묘하게 이 글은 삶의 연장 끝에 놓인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까 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 군상의 삶이 다양한 만큼 저마다 살다 가는 길도 제각각이겠지만, 삶이 죽음을 이미 규정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피어난 꽃은 이렇게 지고, 저렇게 피어난 꽃은 저렇게 진다. 동백꽃처럼, 매화처럼, 산수유처럼, 목련처럼 살다 죽는 것, 그것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은 각자의 몫. 다 아름답고 소중해 보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당신은 어떤 꽃의 삶과 죽음이 맘에 와 닿는가?

 

 나이가 드는 탓일까? 갈수록 나는 목련 쪽으로 기운다. 목련의 자의식, 그 존재의 중량감이 돋보이는 터다. 목련의 낙화를 일컬어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다고 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추켜올리며 산 대가(代價)이기도 하다. 냉큼 죽지 않는 것도 미련을 떨어서가 아니라,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는 생에 대한 외경(畏敬)과 성실 탓이다. 느린 대신 무겁다. 아니, 무겁기 때문에 느릴 뿐이다.

 

 만일 오랜 병상의 세월을 보내는 노인이 있다면 존중하라. 그 모습을 결코 추하다 하지 마라.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헤어짐은 헤어짐다워야 한다. 오랜 사랑의 무게는 시간의 절약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기능적이지만,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고 나서도, 적어도 동네 어구까지 나가서 떠나는 이의 꼭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참된 예의다. 그것이 작별이다.

목련을 옹호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음 시를 보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 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복효근, <목련 후기>

 

안도현(安度眩, 1961~)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며 <너에게 묻는다>에서 하잘것없어 뵈는 연탄재를 옹호했던 것처럼, 복효근(卜孝根, 1962~)은 추해 뵈는 목련의 낙화를 변호하며 사랑과 작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쿨하게 헤어지자고? 상처 따윈 남기지 말자고? 그래서 밥만 잘 먹더라고? 아니다. 이 시인은 제대로 앓기를 원한다. 금세 아무는 상처는 사랑이 아니었음을 반증할 뿐이다. 작별 앞에서 그름에 가는 달처럼 지내는 것, 그러한 초월과 달관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그런 의미에서 목련은 뒤끝이 지저분한 사랑이 아니라 끝난 뒤에도 그 끝까지 사랑하려는 순정함의 표상이다. 떠나는 처지에선 그것이 지저분해 뵐지 몰라도, 말은 바르게 해야 하니, 떠나는 이가 작별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 것, 동백 같은 순교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정말 지저분한 욕심 아닐까.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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