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바지를 벗다가

송담(松潭) 2015. 11. 7. 19:41

 

 

 

바지를 벗다가 

 

바지를 벗어놓으면 바지가 담고 있는 무릎의 모양

그건 바지가 기억하는 나일 거야 

바지에겐 내 몸이 내장기관이었을 텐데 

빨래 건조대에 얌전히 매달려 있는  

내 하반신 한 장 

나는 괜찮지만  

나 이외의 것들은 괜찮을까, 걱정하는 밤 

내가 없으면 옷들은 걸어다니지 못한다.

 

- 박연준(1980~)

 

 

 

 

 

 

 

 내 구두 뒷굽을 보면 중앙이 아니라 조금 옆으로 가서 닳아 있습니다. 나는 모르지만 구두는 알고 있는 내 비뚤어진 걸음이 보입니다. 내 바지는 늘 오른쪽 옆구리부터 올이 일어나면서 닳습니다. 나는 모르지만 다리에 가방을 자주 기대거나 부딪치며 걷는 내 걸음의 버릇을 바지는 알고 있습니다. 옷걸이에 걸려 있거나 빨래 건조대에 걸려 있는 옷도, 구부러지고 구겨지고 해진 옷도, 내 버릇과 바삐 허둥대던 내 일상을 보여주지요. 내가 입었던 것, 내가 만졌던 것, 내가 버렸던 것, 내가 보았던 것들 속에 내가 몰랐던 내 습관과 생각, 내가 모르는 나가 있었네요.

 

 꼭꼭 감추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 비밀은 남의 눈에만 들키는 게 아니라, CCTV에만 들키는 게 아니라 사물에게도 들키고 결국 나에게도 들키고 마는군요. 사람들이 뒤에서 몰래 하는 내 험담이야 안 듣는 게 정신건강에 좋겠지만, 이 시의 바지가 보여주는 뒷담화는 참 슬프고도 아름답네요. 마치 사물에도 진정성이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노출할 수 없는 내 살 대신 내 피부가 되어주는 옷을, 내 몸인 양, 나의 다른 인격인 양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는 어머니의 연민과 아이의 호기심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2015.11.2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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