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나온 수석(壽石)
한때 수석이 붐을 일으켜 많은 수집가들이 전국의 산과 강, 바다를 쫓아다녔다. 이러한 붐을 타고 어떤 수석은 금보다 비싸게(?) 그 몸값을 가진다. 돌의 모습이 기묘하고 어떤 형상을 그대로 닮았거나 질과 색깔이 좋고 윤기가 나면 귀한 대접을 받는다. 나처럼 별다른 취미가 없는 사람은 채집의 열정이 없어 그저 지인들부터 얻은 몇 점의 수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사람으로 따지면 귀족이 아닌 서민 또는 B급, C급 인생과 같은 것들이다.
최근 매형께서 수석 몇 점을 선물해 주셨다. 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좋은 자리(좌대)를 만들어 앉히고 치장(기름을 바름)을 해주면 훨씬 티가 나고 번들해지는데 이때부터 돌은 수석(壽石)이라 불러진다. 그래서 매형께서 주신 수석을 실내로 모실까 했는데 그냥 밖에 두기로 했다. 왜냐면 집안에 물건들이 자꾸 들어와 쌓이면 한정된 공간이 좁아지고 산만해진다. 부자들은 비싼 장식품들을 이것저것 많이 집에 들어 넣고 비싼 것이라 자랑하고 우쭐대지만 자칫 조잡해 보일 수 있다. 내가 전원생활을 하면서 얻은 것은 ‘단순의 미학’이다. 집안의 가구며 정원의 나무 등도 되도록 단순(Simple)하게 하는 것이다. 물건을 최소화하여 빈 공간을 넓히면 하찮은 것도 관심을 끌고 귀하게 보인다. 이것이 바로 여백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다.
집에 온 수석을 좌대가 아닌 투박한 옹기 뚜껑 위에 앉혀 작은 꽃밭에 배치했고, 돌 하나와의 인연에 따라 가끔 정원 일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면서 그들을 감상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돌과 물(水)의 관계
수석을 실내에 장식할 때에는 기름 같은 것을 칠하여 관리한 것으로 아는데 대부분의 수석이 화장을 하지 않고 민낯일 때는 자신의 빛깔을 선연하게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한 것이 아닌 이상 돌은 물을 머금은 상태에서는 얼굴이 환하게 피고 깔끔해지다가 물기가 마르면 다시 창백해진다. 그래서 실내에서 화장을 하고 있는 수석은 평생 윤기를 뽐내며 번들하지만 햇빛을 못 봐 숨구멍이 막혀있다는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자연에 나와 있는 돌은 햇빛, 맑은 공기, 촉촉한 단비를 맞으며 열린 숨구멍으로 호흡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숨 막히는 폭염을 견디다가 한줄기 소나기를 만난 기쁨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실내의 수석은 출중한 미모이나 치장의 기술이 가미된 것이어서 장시간 보면 무미건조해지겠지만 자연의 돌은 생 얼굴의 여인이 촉촉한 비에 젖은 것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풋풋한 기분을 더해 준다.
돌 하나의 사연과 역사
귀한 수석(壽石)으로 불러지지 않고 바깥에 놓여 쇠똥구리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하찮은 돌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는 있다. 돌 하나가 이러한 모습으로 존재하기까지는 무수한 세월과 풍상을 겪은 결과이다. 굳이 억겁이라 하지 않아도 돌 하나하나에 긴 세월의 역사가 있을 것이니 어찌 거기에 스토리가 없을까. 바람과 별과 산새들과의 속삭임을, 지나가는 나그네의 한숨소리를, 누군가의 애틋하고 애절한 사연들을 담고 이것들이 겹겹히 쌓여 오묘한 색깔의 문양으로, 기억을 찾아가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돌을 통해 본 세계
작은 소품을 바라보며 문득 큰 바위나 태산을 상상해 본다.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 골짜기가 있다. 아니, 해발 4,000m가 넘는 험준한 길과 눈 덮인 5,000m 이상의 설산과 아찔한 협곡을 잇는 차마고도(茶馬古道)가 보이는 것 아닌가. 기원 전 2세기경부터 야크(Yak)에 짐을 싣고 티베트로 향하는 고단한 행상 행렬이 아득하다. 그뿐인가. 돌이 쪽빛 바다에 떠있는 섬으로도 보인다. 섬의 하늘 위로 갈매기가 한가히 나르고, 뱃고동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섬이 다가오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돌 하나에 소우주가 있고 돌 하나에 세계가 숨어있다.
딱딱한 무생물에 불과한 돌들이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고, 초여름의 백합꽃 향기에 취할 수 있다고 상상하면 돌은 더 아름답고 생기있게 보인다. 그동안 장식품으로 여겨졌던 수석이 자연에 나와 비로소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슬 젖은 돌을 보면 마음이 한결 싱그러워진다. 비오는 날에는 더욱 그렇다.
< 2016.6.18 >
<2016.6.24 비오는 날에...>
'전원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강 정상현 선생님에 대하여 (0) | 2017.06.21 |
---|---|
섬진강펜션 (0) | 2016.08.05 |
고흥 정토사 서산 스님의 흔적 (0) | 2016.06.01 |
한창미회장님 전원주택 (0) | 2015.11.12 |
창고 & 다실 짓기 (0) | 2014.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