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도덕적 섹스와 윤리적 섹스

송담(松潭) 2013. 12. 15. 23:12

 

 

도덕적 섹스와 윤리적 섹스

 

 

 

 

 스피노자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것에 답하는 것이 그가 생각한 철학의 중심과제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작에 에티카(ethica)’, 즉 윤리학이란 제목을 달았다. 윤리학이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게 좋은지를 가르치는 지식이다. 그런데 어떤 윤리학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스피노자의 기쁨의 윤리학이 그것이다. 좋은 삶이란 어떤 만남을 좋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기쁨의 감응이 최대가 되고 슬픔의 감응은 최소가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윤리학(ethics)이란 말을 듣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은 대개 도덕으로 번역되는 ‘moral’이다. 도덕이란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행하도록 가르친다. 가령 칸트의 정언명령은 어떤 조건에서도 준수해야 할 도덕적 명령이다. 그것을 준수해야 할 이유는 그게 우리에게 기쁨이나 이득을 주어서가 아니라 의무고 규칙이기 때문이다.

 

 가령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는 도덕적 규칙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경찰에 쫓겨 당신 집에 들어와 숨었다. 경찰이 찾아와 묻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인데 숨겨주어야지. 그러나 그러려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여기서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이득이 클지, 기쁨이 최대화되고 슬픔이 최소화될지 계산하는 것은 칸트가 보기엔 도덕이 아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편적 규칙이고 의무라면 비록 어떤 고통을 수반한다고 해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니 가급적 칸트 같은 친구 집으로는 도망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도덕은 어떤 조건이든 지켜야 할 규칙, 모든 조건을 넘어서 준수되어야 할 초월적 규칙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게 규칙을 지키는 것을 (good)’이라 하고 그것을 어기는 것을 (evil)’이라 한다. 도덕은 /의 두 범주에 의해 작동한다. 이점에서 도덕은 좋음(good)’나쁨(bad)’이란 범주를 기초로 작동하는 윤리(ethics)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윤리에선 절대적 규칙이나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초월적 규칙 같은 것은 없다. 그때그때의 조건에 따라 윤리적 규칙은 변경될 수 있고 폐기되거나 새로 만들어질 수 있다.

 

 섹스는 윤리와 도덕의 차이, 좋음/나쁨과 선/악의 차이를 좀 더 쉽고 뚜렷하게 보여준다. 알다시피 기독교는 생식과 무관한 섹스를 금한다. 쾌락을 탐하는 음욕, 그것은 어떤 조건에서도 금지되어야할 악덕이다. 반면 중국의 양생술(몸의 건강을 관리하는 기술)에서 성적 에너지는 ()’를 떠받치는 바탕이어서, 기를 확충하고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남녀간의 성적인 만남은 활력을 주고 기쁨을 주지만, 과도한 섹스는 성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해 기력을 떨어뜨리고 기력이 떨어지면 정신도 무력해진다. 그렇기에 섹스를 하고 쾌락을 얻는 것은 좋지만 정()을 방사하여 기력이 떨어지게 하는 것은 나쁘다. 이런 이유에서 <소녀경> 같은 양생술을 가르치는 책에서 요구하는 것은 교접하되 방사하지 말라는 접이불루(接而不淚)의 원칙이다. 방사하지 않는 섹스, 그것은 생식을 위한 섹스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관점에서는 쾌락을 금한다는 규칙을 어기는 악한 섹스이지만, 윤리적 관점에서는 양생을 위한 좋은 섹스.

 

 ‘선한 섹스좋은 섹스가 이처럼 다르듯이, ‘선한 삶좋은 삶은 다르다. 좋은 삶이란 힘의 증가를 최대한 체감하며 사는 삶이다. 기쁨을 주는 만남을 극대화하고 슬픔을 주는 만남은 극소화하는 삶이다. 그렇기에 윤리학은 항상 기쁨을 추구하는 기쁨의 윤리학일 수박에 없다. 니체가 선악같은 도덕의 근본 범주를 비판하면서 가르치고 싶었던 삶을 사랑하는 방법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니체는 힘의 증가를 추구하는 이런 입장이 생명의 본질에 속한다고 말한다.

 

 

이진경 / ‘삶을 위한 철학수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