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향기로운 봄

송담(松潭) 2013. 4. 19. 16:56

 

 

향기로운 봄

 

 

 

 햇빛이 따뜻해진 다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배추밭의 보온재를 걷어 내는 일이었다. 지난겨울 더러 언 배추를 캐다가 녹여 먹은 행복한 추억이 있는지라 잘하면 봄동으로도 먹을 수 있다.”라는 지인의 말을 믿고 보온재를 덮어 두었기 때문에 자못 기대에 차서 한 짓이었다. 그러나 남은 배추들은 뿌리째 얼어 죽어 있었다. 영하 20여 도를 넘나드는 혹한을 넘어왔으니 당연한 결과였는데도 얼어 썩은 배추를 뽑아내는 일이 그리도 가슴 아팠다.

 

 서울에 한 이틀 다녀왔는데, 현관문 앞에 웬 비닐봉지가 놓여 있다. 냉이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다. 아는 분이 햇냉이를 집 앞에 놓고 간 것이다. 냉이는 가을에 뿌리를 내렸다가 겨울 동안 땅에 바짝 붙어 추위를 견딘 뒤에 이른 봄 가장 먼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나물로, 3월 중순에 먹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4월이 되면 벌써 꽃이 피기 때문이다. 된장찌개에 냉이를 뿌리째 넣어 끓였더니, 이런 봄 호사가 없다. 입안 가득 냉이의 향기가 화하고 퍼지는 게 마음까지 환해진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어서 얼어 죽은 배추에게서 받은 상처가 일시에 씻기는 느낌이다. 진정한 대지의 힐링이 아닐 수 없다.

 

 봄비가 오고, 밭에 나가 보려는데 우산이 없다. 한참 동안 우산을 찾다가 불현 듯 오래전에 이승을 떠난 어떤 친구 생각에 가슴이 찌르르 한다. 말수가 적은 친구였다. 학창 시절 비오는 날에 함께 우산을 쓰고 공원이나 거리를 싸돌아다닌 적도 많았다. 둘이 함께 쓴 우산이지만 한참 동안 내가 일방적으로 떠들면서 가다보면 언제나 우산의 3분지 2가 내게로 넘어와 있곤 했다. 나로선 당연히 우산을 밀어 줄 수밖에. 그러나 걷다가 보면 매번 알지 못하는 사이 우산은 다시 내게로 넘어와 있었고, 친구의 한쪽 어깨는 비에 젖고 있었었다. 아무런 의도 없이, 항상 우산의 3분지 2는 옆 사람에게 밀어주는 힘은 그 친구가 가진 내면의 본원적 사랑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나는 비를 맞으며 빈 텃밭 귀퉁이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어찌 냉이에게 비교할 수 있으랴. 그 친구야말로 진실로 향기로운 봄이었다. 나의 빈집 현관에 냉이를 놓고 간 그 사람도. 봄은 단지 대지에게서만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 속에서 찾고자 했다면 내 삶 또한 훨씬 깊어졌을 터였다. 꽃에만 봄이 깃드는 게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라. 조용히 당신에게 우산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거든 그가 바로 우리가 그리워한, 향기로운 봄일지니.

 

 

 박범신 / 작가, 상명대 석좌교수

 (‘좋은생각’20135월호에서)

 

 

 

 

 

사진출처 : 유형민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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