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감는 여자
대지는 꽃을 통하여 웃는다고 한다. 만개한 목련을 보며 연전에 만난 한 풍성한 여인을 떠올린다. 그때 나는 멕시코 중부 마야의 유적군이 있는 치첸이사라는 곳을 떠돌고 있었다.
밀림 속에 기원전의 피라미드들이 널려 있다는 촌로의 말만 믿고 차를 돌렸는데 풍경이 황홀할 만치 아름다웠다. 검푸른 숲속에 눈펄처럼 흩날리는 흰 나비 떼는 나에게 생명에 대한 그리움과 야성을 일순에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더구나 줄줄이 낳아 놓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길가에서 손을 흔드는 건강한 다산(多産)의 어머니와 그 아이들의 모습은 맨발의 가난쯤은 덮고도 남을만큼 푸르렀다. 그대로가 순연한 자연이어서 부럽고 눈부셨다.
그 풍성한 여인을 만난 것은 밀림 끝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였다. 마을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평화롭게 돌아다니는 돼지와 거위들이었다. 아이들은 해먹에 누워 구름을 세며 놀고 있었다.
여인은 그 속에서 여사제처럼 큰 몸집을 하고 마당 한켠에 있는 말구유에 상체를 거꾸로 들이밀고 머리를 감고 있었다. 풍성한 허리, 자연스럽게 출렁이는 젖가슴, 햇볕에 그을린 피부, 일찍이 이보다 더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신화 속의 대지모(大地母) 같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우리 옛 어머니들의 모습이어서 정말 친근하고 자연스러웠다.
선뜻 말문을 못 열고 그녀가 머리 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왈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동안 무언가 참으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구나 하는 쓰라린 자괴감이 전신을 흔들었다.
물질문명의 산물인 유명상표가 달린 블루진 바지를 세련된 듯 입고 있었고 그럴듯한 선글라스와 최신 휴대폰을 들고 있었지만 이 너덜거리는 문명의 옷가지를 걸치기 위해 싱싱한 생명력과 자유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숲과 사람과 예쁜 짐승들과 돌멩이까지도 얼굴에 태양을 새긴 채 웃고 있는 이 신성한 유토피아에서 나는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공해와 환경 호르몬으로 인하여 오늘날 현격히 줄어들고 있는 정자 수와 수정 능력의 감소 수치는 접어두고라도 겨우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사람의 젖이 아닌 소의 젖을 먹고 자라고 있는 현실과 그 아이들의 누우런 얼굴들이 떠올랐다.
자본주의 상인들이 만든 저울과 줄자에 맞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온갖 방식으로 육체를 억압하는 화장 짙은 도시 여자들의 생기 없고 마른 모습도 떠올랐다.
어느 곳이 진정한 문명 도시요, 어느 곳이 야만의 정글일까.
푸른 숲 대신 괴물 같은 아파트의 밀림 속에서 흉기가 되기 일쑤인 자동차의 홍수에 떠밀리며 허겁지겁 살고 있는 도시는 혹시 슬픈 노예선이 아닐까.
정력을 위해서라면 뱀은 물론 구더기나 지렁이까지도 잡아먹는 남자들과, 외형의 미를 위해 밤낮으로 허리를 조이고 얼굴에 칼을 대며 몸살을 앓는 여자들이 사는 사회를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시커먼 도시의 하수구 속에 떠내려가는 콘돔들과 들어내버린 자궁들과 감별당한 태아들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만 전신에 오한이 일었다.
대지가 꽃을 통해 웃고 있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공해와 황사 속에서도 어김없이 꽃을 피운 저 흙에다 성자처럼 입술을 갖다 대고 싶었다. 미림 속의 그 여인처럼 말구유에 빗물을 받아 오래오래 머리를 감는 모습은 진실로 쉽게 만날 수 없는 풍경인가. 지친 영혼과 오염된 흙을 맑게 씻어내는 일 말고 더 급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가을이 오기 전
뽀뽈라로 갈까
돌마다 태양의 얼굴을 새겨놓고
햇살에도 피가 도는 마야의 여자가 되어
검은 머리 길게 땋아 내리고
생긴 대로 끝없이 아이를 낳아볼까
풍성한 다산의 여자들이
초록의 밀림 속에서 죄 없이 천년의 대지가 되는
뽀뽈라로 가서
야자잎에 돌을 얹어 둥지를 하나 틀고
나도 밤마다 쑥쑥 아이를 배고
해마다 쑥쑥 아이를 낳아야지
검은 하수구를 타고
콘돔과 감별당한 태아들과
들어내버린 자궁들이 떼지어 떠내려가는
뒤숭숭한 도시
저마다 불길한 무기를 숨기고 흔들리는
이 거대한 노예선을 떠나
가을이 오기 전
뽀뽈라로 갈까
맨 먼저 말구유에 빗물을 받아
오래오래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 그대로
천년 푸르른 자연이 될까
문정희 「머리 감는 여자」 전문
*뽀뽈라 : 멕시코 메리다 밀림 속의 작은 마을 이름
문정희 /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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