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마지막 이름

송담(松潭) 2012. 5. 8. 16:07

 

마지막 이름

 

 

 

 한동안 이름을 잊고 살았다.

 잊은 건지 잃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집 새댁으로, 누구 마누라로, 누구누구 엄마로만 살았다. 이름 없이 사는 동안 나 또한 실종되었을 것이다. 이름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찾기 위해서, 어디론가 떠내려간 나를 건지기 위해서, 이 골 저 골을 허우적거렸다.

 

 글을 쓰고 나서부터 몇몇이 다시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하였다. 아무개 씨에서 아무개 님으로, 아무개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도 생겼다. 촌스럽고 무뚝뚝한 내 이름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렵게 찾은 이름을 분실하지 않으려고 깊은 밤 불침번을 서기도 했다.

 

 살다보니 그때그때 이런저런 이름이 생겨나기도 했다. 시장에 가면 아주머니요, 백화점에 가면 고객님이요, 미용실에 가면 사모님이다. 운전미숙으로 접촉사고라도 나는 날에는 이 아줌마가!’하는 삿대질도 감수해야 한다. 처음에는 쑥스럽다가도 이내 익숙해지는 것이 호칭이어서 사모님이라 부르면 사모님인 척, 선생님이라 부르면 선생님인 척 산다.

 

 올 가을, 나는 다감하고 헌칠한 한 청년의 장모님이 되었다. 잘 키워놓은 남의 아들에게서 어머니 소리를 들을 때마다 염치없이 뿌듯한 기분이 든다. 얼마 후에는 할머니도 될 것이다. 할머니란 호칭이 달갑지는 않지만 내 아이의 아이에게 따스한 어른으로 기억되는 일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쓸쓸하면서 포근한 이름, 할머니. 할머니는 청춘을 반납한 여자에게 수여되는 마지막 작위일지도 모른다.

 

 먼 길 떠나는 어른들을 배웅할 일이 잦아진 요즘, 인생의 말년에 또 하나의 이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원으로 왔다 병원에서 가는 인생, 비명횡사나 사고사가 아니고는 먼저 가신 분들의 마지막 이름이 하나같이 000환자님이었다는 사실이 간간히 나를 슬프게 한다.

 

 

최민자 / ‘손바닥 수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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