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하루하루를 꽃밭으로 장식하라

송담(松潭) 2012. 11. 9. 10:06

 

 

 

하루하루를 꽃밭으로 장식하라

 

 

 “없는 살림엔 제사도 자주 닥친다”는 말이 있는데, 내 어릴 적, 어려운 시절에는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것도 참 많았다. 잡부금을 포함해서, 집에서 만든 걸레와 유리창 닦기, 집에서 기른 화분, 편지봉투에 담은 이웃돕기 쌀, 매 주 월요일마다 저금도 가져오라 했고, 가져오지 않았다고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친구들도 많았다. 어쩌다 재수 없을 때면 금붕어도 가져가야 했다. 언젠가 당번이던 날 금붕어가 죽었는데 선생님은 나에게 당번이기 때문에 금붕어를 변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죽인 것도 아닌 금붕어를 물어내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몹시 부당하다고 느꼈던 기억과, 그때 죽은 금붕어를 어항에서 건져 올릴 때의 마음 아팠던 기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 씁쓸한 기억 때문인지 나는 당시 내 또래들과는 달리 여치나 메뚜기, 병아리(특히 학교 정문 앞에서 팔았던), 물방개 따위를 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견된 그들의 죽음과 죽음으로 인한 헤어짐의 애잔한 느낌이 싫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웃과 주위 생명체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불편하고 무거운 느낌은 그동안 익숙하고 친숙한 관계의 단절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죽음, 나의 죽음 역시 그동안 함께 한 것들, 함께한 이들과의 이별이고, 영원한 결별의 선언이라면, 죽음은 그동안 함께 한 이들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미안함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과정이겠지만, 죽음이 나를 데리러 온다면, 나는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나 내 삶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많이 힘들 것 같고,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부질없는, 그리고 재수 없는 상상이지만 만일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면, 그 슬픔은 견딜 수 있겠지만 내 죽음으로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참아낼 수 없을 것 같고, 그 미안한 마음은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본질은 관계’라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이웃과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내 삶이고 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논거이기도 하다.

 어느 장례식장, 고인의 두 자녀가 고인의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자 상자 안에서 한 마리의 호랑나비가 날아올랐다. 동시에 참석한 조문객들이 미리 받은 종이봉투를 열었고, 각자의 봉투에서 수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파란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파격적인 장례식의 주인공은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죽음과 죽어가는 이들의 동반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였다. 퀴블러 로스는 자신이 죽기 전,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장례식을 축제의 장으로 연출해 놓았었던 것이다. 호스피스의 개척자로 살았고, 특히 죽어가는 이들과의 관계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던 고인은 결국 죽음과 관계를 통찰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축제로 받아들였고, 축제로 표현한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로 보낸다. 단어의 의미대로 위령성월은 우리보다 앞서 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영혼들이 하느님 자비 안에서 안식을 누리도록 간구하는 달이다. 동시에 교회는 죽음과 죽은 이들을 기억함으로써 이곳과 지금(here and now),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돌아보고, 받아들이도록 재촉한다. 나아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통해 나의 삶, 한정된 이웃과 한정된 관계를 이어가는 내 삶의 매 순간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만일 내가 그리고 우리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사는 존재라면 그 무한한 시간의 의미 없음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이재술 / 목포가톨릭대학교 교수·신부

(2012.11.9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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