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과 시뮬라시옹(Simulation)
프랑스의 현대사상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1929∼2007)는 “우리는 사물이 아닌 기호(記號·상징 또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설파했다.
보드리야르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이 기아자동차의 쏘울(SOUL)처럼 값싸고 실용적인 소형차를 외면하고, 비싸고 커다란 벤츠(BENZ)를 타고 다니는 이유도 바로 ‘기호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안전하고 편안해서가 아니라, 벤츠가 상징하는 ‘사회적 지위와 부(富)’라는 이미지를 구입한다는 얘기다.
국내 최고의 MC 강호동도 마찬가지다. 시청자들에게 강호동의 일상생활은 관심 밖이다. 시청자들이 환호하는 것은 방송과 광고에서 되풀이되는 그의 착실하고 유머러스한 이미지일 뿐이다.
보드리야르는 벤츠나 강호동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의 기능보다도 그 사물이 지닌 이미지를 더 중시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실재는 사라지고 이미지만이 남게 되는 과정을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 이름짓고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제시했다.
영화 ‘매트릭스’를 제작한 워쇼스키 형제도 시뮬라시옹 이론을 차용했다. ‘시리즈 1’의 잘려나간 영화 대본에는 모피어스가 주인공인 네오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네오, 너는 지금까지 꿈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어.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말이야. 너의 전 생애가 땅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도위에 있었던 거지.”
명품업체인 에르메스의 버킨(Birkin) 핸드백을 사기 위해 국내에서 1000만 원이 넘는 선금을 내고 대기표를 받은 사람이 1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버킨 핸드백이 단순한 가방의 차원을 넘어서 ‘부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기호’로 승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가죽가방 한 개가 이렇게까지 비쌀 수 있느냐는 시답잖은 항의는 집어치워야 할 것 같다. ‘지금은 기호를 소비하는 시대, 욕망을 소비하는 시대’가 아닌가.
홍행기 / 정경부차장(2011.9.7.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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