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정신승리법’의 시대

송담(松潭) 2011. 7. 26. 10:53

 

 

정신승리법의 시대

 

 

 

 아Q는 자존심이 강하다. 품삯일로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면서도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렇다고 주먹을 좀 쓰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동네 건달들에게 늘 얻어맞고 다닌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을 이렇게 두둔한다. ‘아들놈한테 얻어맞은 걸로 치지 뭐, 요즘 세상은 막돼먹지가 않았어.’ 그러면 순식간에 마음이 유쾌해진다. 이게 그 유명한 아Q의 정신승리법이다.

 

 그의 정신승리법은 나날이 진보한다. 동네사람들한테 벌레취급을 당하자 자기야말로 자기를 경멸할 수 있는 제일인자라고 여긴다. ‘자기경멸이란 말을 제외하면 남는 건 제일인자아닌가, 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한번은 노름판에서 된통 당하고 온 적이 있었다. 이때는 오른손을 들어 두세 번 자기 뺨을 힘껏 때린다. 그러자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면서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중국근대문학의 거장 노신의 <Q정전>은 전편에 걸쳐 이런 충격적 서사들로 가득하다. 보다시피 아Q는 웃긴다. 하지만 이 웃음 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깊은 적막이 드리워져 있다. 동정과 연민 때문에? 아니다. 시대적 모순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것도 아니다. Q를 지배하는 저 망상의 그물망이 너무도 넓고 깊어서다. 대체 저 심연에서 벗어날 길이 있기나 한 것일까? 어떤 혁명이, 어떤 제도가, 어떤 교육이, 저 정신승리법의 심오한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렇다. Q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정신승리법의 진화는 더 한층 눈부시다.

 

 정신승리법이란 무엇인가? 현실과 어떤 연계도 맺지 못하는, 오직 망상의 환타지에서만 작동하는 자기도취의 심리적 기제. 모든 문제는 세상 탓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삶의 현장을 돌아보지 않는다, 탓하거나 도취되거나 - 이것이 기본공식구다. 우리 시대가 즐겨쓰는 모티브는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 따위다. 꿈과 희망을 품어라, 사랑은 아름답다는 주문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런데 꿈과 희망이 커질수록 세상과 일상은 하찮아진다. 그러면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더 큰 꿈을 기획해야 한다. 더 큰 대회를 유치해야 하고, 더 센 이벤트를 해야 하고, 더 놀라운 쇼를 해야 한다. ! ! 대체 왜 그렇게 엄청난 꿈이 필요한 거지? 그러면 이렇게 답한다. 사랑을 위해서라고. 사랑만이 삶의 진정한 의미라고? 사랑의 본질이나 가치에 대해선 결코 묻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외울 따름이다. 더 놀라운 건 이때 사랑이란 하는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받는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주 독특한 정신승리법이 탄생한다. 내가 꿈을 이루지 못한 건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내가 희망을 잃은 것은 세상이 날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마치 빚 받으러 온 채권자마냥 오직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상처받은 영혼이 순수하다는 명제가 그것이다. 그 결과 드라마에서건 현실에서건 온통 상처뿐인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러자 이젠 누가 더 많은 상처를 받았는가가 관건이 된다. 상처가 깊을수록 그 영혼은 더 순수해지는 법이니까. Q가 자기경멸의 제일인자가 되고 자기 뺨을 스스로 때리면서 승리감을 맛보았던 것처럼 바야흐로 상처도 스펙이 되었다. 몽롱한 꿈 속을 헤매거나 상처받은 영혼으로 거듭나거나 - 이것이 우리 시대 정신승리법의 새로운 스타일이다.

 

 아Q정전의 결말은? 처참하다. 때는 바야흐로 혁명의 시절. 아큐가 살던 마을에도 혁명군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에게는 혁명조차 망상게임에 불과했다. 결국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정신승리법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의 비극은 죽음 자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서있는 삶의 현장을 한번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았다. 늘 승리했지만 그 승리 속에서 그의 삶은 실종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보다시피 아Q의 망령은 실로 집요하다. 하지만 그 망령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신의 발바닥을 보면 된다. 발이 있는 곳이 곧 내 삶의 무대다.

 

고미숙 / 고전평론가

(2011. 7. 26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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