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慈悲)의 정신
하나의 마음에 근거하여 두 가지 양태의 마음이 있다.
두 가지 마음의 양태란 무엇인가?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요동치는’마음이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과 ‘요동치는 마음’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 『대승기신론소 별기』 -
원효는 마음에는 두 가지 양태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요동치는 마음’이다. 불교계에서는 전자를 진여문(眞如門)이라고, 후자를 생멸문(生滅門)이라고 이야기한다. 원효는 마음을 호수나 바다에 가득찬 물로 비유할 때가 많다. 물로 비유하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은 어떤 동요도 없어서 고요하고 맑은 물에 비유될 수 있다. 반면 요동치는 마음은 물의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동요가 발생하여 풍랑처럼 요동치는 탁한 물에 비유될 수 있다. 해탈 또는 열반은 마음이 생멸문 상태에서 진여문의 상태로 이르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상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요동치는 마음’이 고요해져서 잔잔한 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된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해탈하기 이전의 우리 마음, 즉 ‘요동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내면, 즉 기억의식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열정적으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반대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두 명의 남녀가 있다고 하자. 불가항력적인 이별은 두 사람 내면에 모두 지울 수 없는 결여의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인간은 금지된 것과 결여된 것을 욕망하는 법이다. 만약 그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그의 새로운 애인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과거 애인과 흡사한 분위기나 기질을 가진 삶일 것이다. 물론 그녀가 새로운 남자를 사랑하는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볼 수 있다. 남편으로부터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내는 아이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여를 충족시키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해 남편의 애정을 지금도 충분히 받고 있다면, 아이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지금처럼 강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과거에 발생한 결여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무언가를 사랑하고 욕망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욕망과 애착의 기원을 일종의 기억의식인 알라야식에서 찾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바로 이 알라야식을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해탈과 열반을 추구했던 불교도들의 핵심과제였다. 만약 알라야식을 끊어낸다면 ‘요동치는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마음’, 즉 고요하고 맑은 물과 같은 마음으로 변할 수 있다. 고요한 물과 같은 마음 상태는 이제 어떤 동요도 받지 않게 된 것일까? 바로 이 대목에서 원효의 묘수풀이가 빛을 발한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은 단지 내적인 동요만이 사라진 마음이라는 것이다.
분명 애인이나 남편에게서 얻지 못했던 사랑의 기억을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또 다시 동요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만난 사람이 번뇌로 괴로워하면, 그의 고통은 우리 마음에 전해질 것이다. 만난 사람이 즐겁다면, 그의 행복감은 우리 마음에 깃들게 될 것이다. 물론 고통이나 행복감에 공감하는 마음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라기보다 분명 ‘요동치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 마음의 요동은 내부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외부 타자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잊지 말자. 불교에서 모든 요동치는 마음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은 극복의 대상이었지만, 외부로 인해 요동치는 마음은 긍정의 대상이었다. 전자가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음이라면, 후자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조우하여 그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산들바람이 불면 고요한 물은 그에 걸맞게 부드럽게 요동친다. 간혹 폭풍이 몰아치면 고요한 물은 그에 상응하여 거칠게 요동친다. 불교에서는 바로 이런 상태의 마음에 도달하고자 했다. 불교가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을 부정하려고 했던 진정한 이유는 타자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타자의 고통이나 행복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어느 경우든 고요한 물과 같은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은 자비를 꿈꾸던 불교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일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깨달은 사람의 마음이 가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깨달은 자의 마음이 가진 두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마음이 맑다는 것’이 첫 번째 특징이고,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다.(.......)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은 마음이 맑아짐에 근거하여
탁월하고 신비한 일체의 상태를 만들 수 있는 법이다.
『 대승기신론소· 별기 』
깨달은 자의 마음은 맑다. 그렇지만 맑고 고요한 물이 외부의 바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맑은 마음은 타자에 대해 섬세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마음이다. 번뇌에 사로잡힌 사람에 공감하면서도, 깨달은 사람은 그의 번뇌를 치유할 수 있다. 돈과 권력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에 공감하면서도, 깨달은 사람은 그의 욕망은 치유할 수 있다. 자신을 찾아온 어떤 사람도 직접 야단치거나 훈계하지 않아도, 깨달은 사람은 그를 조금씩 집착과 번뇌로부터 자유롭도록 만들 수 있다. 원효가 깨달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을 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야 알 것 같다. 특정 사람만을 사랑하려고 고집한다면, 우리는 타자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없다. 손으로 연필을 잡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면, 컵, 책, 나아가 타인의 차가운 손도 잡아줄 수가 없다. 따뜻한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모든 사람들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져주기 위해서, 우리는 매번 자신이 잡았던 손을 놓아주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싯다르타가 꿈꾸던 자비의 정신 아닌가?
강신주 / ‘철학이 필요한 시간’ 중에서
* 위글 제목 ‘자비(慈悲)의 정신’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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