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조증으로 폭발하기
2002년 월드컵 때 우리 국민은 누구나 붉은 티셔츠를 입고 한마음이 되어 거리를 내달렸다. 거리에 흘러넘치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보면서 저것은 축제의 마음일까 원한의 마음일까 짚어본 일이 있다. 우리 축구 대표팀의 승리는 식민지, 전쟁, 가난, 개발독재로 이어져온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 만나는 승리의 경험 같았다. 온 국민이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거리에 흘러넘칠 때 그 힘의 분출은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해 보였다. 강렬할 뿐만 아니라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집단 나르시시즘은 개인의 나르시시즘보다 인식하기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이 ‘나와 우리 가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며, 우리만이 훌륭하고 지성적이며 품위 있다’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 사람을 미숙하고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어떤 광적인 연사가 ‘나와 우리 가족’ 대신에 국가와 민족, 종교 등을 내세우며 우호 집단의 대중 앞에서 연설한다면 그는 애국심이나 신앙심이 높은 사람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집단 구성원의 나르시시즘은 더욱 의기앙양해지며, 사람들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그의 연설은 합리적인 듯 보이게 된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중 한 대목이다. 월드컵 경기에서 승리에 도취되어 그토록 흥분할 때 그것이 바로 집단 나르시시즘의 폭발이었다. 그것은 우리 국가 대표팀이 축구경기에서 이겼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그토록 훌륭하고, 아름답고, 특별하다는 사실에 도취된 감정이었다. 그 나르시시즘은 자기 성찰 없이 폭발하여 우호 집단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걷잡을 수 없이 거세게 흘러넘쳤다.
나르시시즘뿐 아니라 다른 감정들도 우리는 자주 폭발하듯 표출하는 성향이 있다.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할 때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원한과 슬픔, 그리고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흘러넘쳤다. 금강산댐은 그 시나리오부터 온 국민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전쟁에 대한 공포심이 전국에 휘몰아치게 하여 거금의 성금을 모았다. IMF 경제 위기 때는 가난을 경험한 세대의 불안감이 추동되어 온 국민이 장롱 속의 금을 꺼내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사실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짧은 기간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가난에 대한 불안과 결핍의 에너지인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가 승리에 도취되어 그토록 자축의 잔치를 벌인 것은 나르시시즘이고, 그것이 과잉되게 표출된 것은 조증이고, 다른 의견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거세게 휘몰아치던 양상은 파시즘이다. 조증(manic)이라고 번역되는 그 심리 상태는 어떤 감정이든 과도하게 팽창되는 상태를 말한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감정의 폭발, 혹은 에너지 과잉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불안감이든, 나르시시즘이든, 행복감이든 보통의 경우보다 높은 상태로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이 조증이다.
김형경 / ‘좋은 이별’중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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