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노천카페에 혼자 앉아

송담(松潭) 2009. 8. 14. 11:06

 

노천카페에 혼자 앉아

천천히 커피를 마셔보라



.......(생략.....)


 나이가 들수록 삶의 속도가 빨라지는 이유를 심리학자들은 ‘회상효과’로 설명한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많으면 그 삶의 시기를 길게 느끼고, 기억할 수 있는 내용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시기는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의 기억은 생생하고 많은 내용이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노인도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분주하게 열심히 살았다고 여겨지는 40~50대의 기억은 별로 특별한 것이 없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설명할 일이 많지 않다. 정신없이 바쁘기는 했지만 별로 의미를 부여할 일이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재미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의 기억들은 모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벅찬 일들이 대부분이다. 새로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장기기억장치로 저장하는 정보처리 과정이 매번 활성화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모든 일들이 ‘그저 그런’ 것들이 된다. 그다지 기억해야 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바로 삶의 마디를 만드는 일이다. 대나무의 마디처럼 삶의 마디가 있을 때만 삶은 살 만한 것이 된다. 이 마디를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축제’다. 내 청춘의 삶이 활어처럼 펄떡거렸던 까닭은 온통 축제로 가득 찼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을 보라. 온통 축제투성이다. 달력에 가득한 빨간날들로도 부족해서 서로 사귄 지 100일, 200일 등을 기념하며 축제를 즐긴다. 서양의 희한한 기념일들을 수입해서 즐기기도 한다. 벨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등.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짜장면데이. 빼빼로데이와 같은 토종축제도 만들어낸다. 이를 단지 자본주의의 상술로만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 상상력이 뒤떨어지는 설명이다.


 우리가 지내는 설날, 추석 같은 명절 또한 화살처럼 날아가는 시간을 붙잡기 위한 ‘마디 만들기’ 축제다. 축제를 통해 시간은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축제를 할 때마다 시간은 내가 통제할 수 잇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축제는, 영원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마치 매번 반복되는 것처럼 느끼도록 내 삶의 통제력을 높이는 수준 높은 문화전략인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삶의 축제는 사라진다. 크리스마스의 저녁은 오래된 미국영화나 보다 잠드는 날이다. 추석이나 설날은 수퍼에서 사온 송편이나 떡국으로 저녁을 때우는 날이 되어버렸다. 모처럼의 여름휴가조차 한풀이식 시간 죽이기로 흘려버린다. 삶이 매듭지어지지 않고 마디가 없으니, 느끼는 시간의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나무의 마디는 속이 비어 있는 그 가느다란 나무를 20~30미터까지 올라가게 한다. 마디가 촘촘하고 튼튼한 대나무는 웬만해선 부러지지도 않는다. 마디가 있는 삶은 천천히, 그리고 의미 있게 흘러간다. 기억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자. 사회적 지위나 정치적 사건을 기억하는 일이 내 삶의 가치를 높여주지 않는다. 나와 관계없는, 허접한 기억들로 인해 내 삶의 속도는 더욱 정신없어진다. 마디가 없이 그저 뻣뻣하게 위로만 올라가는 삶은 언젠가는 한 번에 부러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부러진 삶을 일으켜 세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삶에서 기억해야 할, 의미 있는 일들을 꼼꼼히 챙기는 일만이 내 삶의 속도를 낮춰준다. 올해에는 아주 완벽하게 혼자 보내는 휴가를 계획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마디가 없었던 내 삶에, 마디 한번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다.


 혼자 떠난 며칠간의 휴가 동안, 허름한 시골마을의 담벼락을 기웃거리며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혼자 산에 오르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며 철저하게 외로워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매일 같이 분위기 있는 노천카페를 순례하며 한구석에 혼자 앉아 만년필과 가죽수첩을 꺼내, 내 일상의 마디를 적어보는 것은 또 어떨까? 혹시 아나? 부작용으로 오래전에 사라졌던 ‘수컷의 향기’가 다시 돌아올지....


김정운(문화심리학자)/‘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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