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남자의 못난 연애
서른 두 살의 한국인 유학생 윤식은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성우 같은 목소리에 이따금 소리 없이 짓는 미소 또한 일품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이른바 잘나간다는 집안의 막내아들이었고,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몰고 다니는 차 또한 고급 브랜드의 스포츠카였다. 그를 보고 나는 한눈에 이렇게 생각했다.
“여자 문제가 꽤 복잡하겠구나.”
윤식은 말한다. 저에게 여자를 사귀는 일처럼 재미있고 쉬운 일은 없습니다. 일단 여자들에게 적당히 호감을 주기만 하면게임은 끝나는 거죠. 제 호감에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면, 그 뒤엔 일사천리로 진도를 나갔습니다. 물론 그 단계에 이르면 순진한 여자들은 혼란스러워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데 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 혼란스러워하는 여자들이야말로 종국에는 저에게 일편단심으로 대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까지입니다. 여자가 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부터, 저는 상대방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지 않습니다. 필요할 대, 외로울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여자란 정복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들이 받는 상처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상처는 무슨 상처입니까. 결국에는 다들 제짝 만나서 잘 지냅니다. 여자들은 보통, 다른 남자가 생기면 과거 따위는 다 잊어버려요. 그 공식을 뻔히 알고 있으니 여자들한테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못 느낍니다. 단지 정말 기분이 찝찝하고 더러울 때가 있기는 합니다. 처녀와 잠자리를 했을 때입니다. 그럴 땐, 제가 첫 남자라는 사실이 정말 부담스러워요.
‘이 인간을 그냥....’
속으로 이렇게 주절거리는 순간, 문득 이런 이야기들을 가십마냥 듣고 즐겼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애인이나 배우자가 생기기 전까지는 맘 맞는 동성 친구와 만나 시간을 때운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때때로 ‘인간은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동물’이라는 말로 들인다.) 이렇게 동성 친구를 만나면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바로 ‘연애’다. 나도 한 때 윤식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각자의 여성편력을 자랑삼아 말하는 것을 듣고 웃었던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좌충우돌 연애 이야기가 그땐 왜 그리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테라피스트(정신적인 문제를 격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치료를 담당하는 사람)라는 직업을 갖게되면서부터는 이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런 이기적 편력으로 아파했을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먼저 떠올린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렇게 화려한 여성편력을 가진 윤식에게 상처받았을까. 그런데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러 왔단 말인가. 적반하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략.....)
사랑으로 상처 받은 그녀들에게 고함
처음 윤식에게 그의 이야기를 글로 써도 좋겠냐는 허락을 받을 때, 난 사랑으로 상처 받은 여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윤식은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으며 자신 보다 더 황달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했다. 사실 웃음이라는 게 얼마나 좋은 마음의 치료약인지 모른다. 덕분에 그날 이후 윤식과 나는 더 가까워졌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부탁한 윤식의 조언을 전한다.
진정한 연애의 고수는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수많은 여자들을 사귀고 헤어지면서도 그 누구한테도 원망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로 ‘쿨’하게 헤어지는 상황을 연출하는 거죠. 어떤 남자들은 잊지 못하는 첫사랑, 자신에게 상처를 준 옛 여자 이야기를 운운하고, 실제 이런 이야기에 함께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순진한 여자들로 있지만, 그런 남자들은 하수에 속합니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여자의 약점이나 실수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헤어지는 구실로 이용하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헤어질 수밖에 없는 여자와 나누어 갖게 되는 거죠. 잘만 하면 여자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되는 묘기가 연출되기도 하죠. 웃긴 건요. 이런 경우, 여자는 그 남자를 욕하고 증오하기는커녕 오히려 잊지 못하고 자신을 원망한다는 사실입니다. 고수에게는 완벽하게 목표를 달성한 셈이죠.
하지만 그런 연애의 고수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많습니다. 제 한 친구는 말입니다. 여자친구와 일상적인 말다툼을 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헤어지자고 하더랍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해 놓고 전화도 받지 않고 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더래요. 알고 보니 잘 나가는 한의사와 결혼을 한다지 뭡니까. 제가 더 답답한 건 그 친구의 반응이었습니다. 자신이 더 잘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거라나 뭐라나. 저랑 사귀었던 여자들에게 이 친구 얘기를 해주면 거의 뭐라는 줄 아세요? 그 친구 말이 맞다고 하더군요. 제 친구가 더 잘했으면 도망가지 않았을 거래요. 그럼, 남자가 헤어지자고 해도 나쁜 놈이고 여자가 헤어지자고 해도 남자가 나쁜 놈이란 말입니까. 그건 너무 부당하지 않습니까.
선생님, 제가 그동안 아무리 개념없이 여자들을 만났더라도 말이죠. 저의 첫사랑 이야기는 정말 사실입니다. 그땐 정말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이런 책이 필요할 겁니다. 여자들에게 상처 받고 힘들어하는 남자들도 많다는 걸 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실연으로 가슴 아파하는 여자들에게는 이런 조언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문제로 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그 남자는 반드시 헤어져야 할 다른 문제를 억지라도 찾아냈을 겁니다. 맞습니다. 당신들은 속은 겁니다. 하지만 오히려 잘됐습니다. 이제부터는 차라리 그 남자를 증오하시고 그런 남자는 피해주시면 됩니다.
더 중요한 건, 당신의 온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그런 상대를 만나는 것입니다.
권문수 /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중에서
위 글과 아래 사진은 관련성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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