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룡유회(亢龍有悔)
주역(周易)을 연구하는 사람의 최대 고민은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을 어떻게 주역의 64괘로 환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상황이 과연 64괘 중에 어떤 괘에 해당되는 것인가를 놓고 분석과 환원, 그리고 종합을 수십 번 반복하느라고 고도의 정신 집중을 해야 한다. 일단 어떤 상황이 64괘 중의 어떤 괘(卦)로 적용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그 괘가 지닌 의미를 해석하고 따라가면 된다. 괘가 나오면 이때부터는 예측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만약 괘를 잘못 적용하면 엉뚱한 예측과 결론이 도출되어 버린다. 주역공부의 내공은 바로 이 '적용력(適用力)'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자(朱子)가 당시 조정의 권신(權臣)들과 대립하고 있을 때 자신의 진퇴문제를 놓고 제자들 사이에서 설왕설래가 많았다. 결국 주역의 괘를 뽑았다. 이때 나온 괘가 33번째 천산돈(天山遯) 괘라고 전해진다. '돈'(遯·읽을 때는 '돈'이라고 읽음)은 숨는다는 뜻이다. 주자는 무이산(武夷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지난 2004년 탄핵 직전에 탄핵을 결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당시 민주당의 조순형 대표는 괘를 뽑아 보았다. 30번째 괘인 중화리(重火離) 괘가 나왔다. 그 점사(占辭)의 핵심은 '적장의 목을 벤다'는 내용이었다.
요즘 명과 암이 동시에 찾아온 삼성그룹을 보면서 이 상황은 과연 어떤 괘로 환산될 수 있는가를 놓고 사색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이 10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작년 말 현재 전기전자업계에서 연간 매출 1000억 달러 이상인 곳은 독일 지멘스와 미국의 HP 두 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반면에 연일 매스컴에는 삼성특검 압수수색 상황이 보도되고 있다. '1000억 달러 매출'과 '청룡도 칼바람'의 길흉동래(吉凶同來)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건(乾)괘에 나오는 '항룡유회(亢龍有悔·높이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다)'로 해석하고 싶다. 하지만 후회가 두려워서 높이 안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빌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주창하고 있다. 기업들이 빈곤퇴치에 앞장서야 한다는 말이다. 부의 극한에까지 가본 사람 이야기이다. 창조적 자본주의는 '항룡무회(亢龍無悔)'로 가는 길이다.
조용헌 / 2008.1.29 조선일보
비보(裨補) 연못
풍수에서는 '비보(裨補)'라는 개념이 있다. 모자라는 곳을 도와서 채워 준다는 뜻이다. 어떤 장소든지 100% 완전한 명당은 없기 때문에 약점이 조금씩은 있기 마련이다. 터가 너무 강한 곳은 석탑이나 석상(石像) 같은 것을 세워서 눌러 주고, 약한 곳은 땅을 돋우거나 나무를 심든가 해서 이를 보강하는 방법이다.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는 것도 이러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한 가지 방법에 속한다. 이번에 불이 난 숭례문(崇禮門) 앞에도 비보 용도로 파 놓았던 연못이 있었다.
바로 남지(南池)이다. 숭례문에서 서울역 쪽 방향에 판 연못이었다. 지금은 이 연못 터가 메워지고 그 자리에는 '이 연못을 장원서(掌苑署)라는 부서에서 관리하였다'는 내용의 표석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 남지는 숭례문 밖의 화체산(火體山)에 해당하는 관악산(冠岳山)의 화기(火氣)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용도로 파 놓았던 것이다. 산의 모습이 뾰쪽뾰쪽하고 날카로운 모습의 바위로 되어 있으면 풍수에서는 이를 화체(火體)로 간주한다. 불꽃으로 보는 셈이다. 관악산이 이렇게 생겼다. 강원도 설악산이 또한 대표적인 화체산이다. 그래서 풍수가에서는 설악산 일대의 사찰에서 유달리 불이 많이 났다고 믿는다. 앞산이 불꽃처럼 생긴 바위산이 포진해 있으면, 이런 터의 대문 앞쪽에는 인공적으로 연못을 조성해 놓는 경우가 많았다. 영험한 '기도발'을 중시하는 불교 사찰 터의 앞에는 화체산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시대 일반 주택에서는 이러한 화체산이 바라다 보이는 장소를 되도록이면 피했다.
하지만 좌청룡 우백호나, 터를 감아 도는 냇물과 들판이 좋고, 집 뒤의 배산(背山)이 좋다면 앞에 화체산이 있더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주택 터를 잡는 경우가 있다. 구례의 '운조루(雲鳥樓)' 터가 바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앞산이 약간 화기가 있는 바위산이다. 그래서 운조루에는 대문 앞에 네모진 형태의 연못이 있다. 축대를 쌓아서 인공적으로 조성한 '비보연못'인 것이다. 또 하나 화재 예방 장치는 운조루 대문 앞을 흘러서 나가는 조그만 자연 수로(水路)이다. 이를 내당수(內堂水)라고 부른다. 물론 집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이 연못과 수로의 물을 직접 퍼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용헌 / 2008.2.1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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