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무의식 / 프로이트 무의식의 발견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적 삶과 능력을 주도하는 체계나 기관이 단 하나가 아니라 복수의 힘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르렀다. 프로이트는 데카르트가 사물을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실재로 구분했듯, 정신이나 심적 생활도 현상과 실재로 구분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1차적이고 표면적이지만 진정한 함의나 진의를 담지 못하는 텍스트가 의식이라는 현상이라면, 2차적이면서도 심오하고 하려는 바의 욕망을 그대로 담은 무의식이라는 실재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무의식적인 힘들과 영역들은 의식이 잘 관리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일정한 자리와 경계를 확보하고 버티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무의식의 현상들에 대한 관찰과 기술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 신비주의자 보메(Jakob Bohme), 라이프니츠, 쇼펜하우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등이 이런 시도들을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관찰한 학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무의식적 심리 현상을 의식의 부주의나 비자각성 등으로 설명하려했을 뿐으로 , 이는 프로이트 이후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무의식적 심리 현상들을 일시적인 상태나 잠정적인 경우들 가운데 하나 또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는 인식론적 틀이나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무의식을 상태가 아닌 체계로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필연적인 힘으로 규정하게 된 것은 프로이트와 함께 가능해진 것이다.
실언(失言) 현상도 무의식 확립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인사로 “반가워”가 아니라 “잘 가”라고 했다면, 반가움과 거부감의 투쟁 속에서 갈등하며 거부감이 반가움을 힘겹게 누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체계로서의 무의식을 학립하고 근거 짓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것은 꿈이다. 신경증적인 증상은 다소 제한된 사람에게 일어나며 주도면밀한 관찰자에 의해 기록되고 인정된다. 반면 꿈은 무의식으로 우리를 이끄는 보편적인 창구와 같다. 꿈과 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꿈의 일반적인 정의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기억하기도 하고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는 수면 중의 체험이다.
꿈이라는 탈의식적인 진행과 절차는 프로이트에게 그동안 인간 정신이나 심리 안에 억압되어왔지만 온전히 제거되거나 사라지지 않은 심리적 집적체들의 존재와 그 방식이 엄밀히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결국 무의식은 정신적 삶의 고유한 영역으로서의 공간성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공간성이 지니는 정당성과 적법성도 확보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에게서 배제된 정신적 활동과 내용을 담은 무의식을 어떻게 대면하고 수용해서 의식화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무의식을 의식화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의식이 무의식의 욕망과 충동을 현실과의 대면 아래 자기화하는 일이다. 이때 ‘현실’이란 무의식적 욕망과 충동을 소외시키고 배제하게 한 모든 외적 조건을 뜻한다.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이 유아기 때부터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만나고 부딪치게 되는 부모, 다른 가족, 친구 집단 그리고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못한 욕망과 관련된 모든 사물 세계를 포함한다. 외적 현실의 제약이나 구속을 적절히 조절하면서도 무의식의 소망을 들어주는 이중적인 과제가 바로 의식화 작업이다.
현실과 양립하기 어려웠던 욕망과 충동들은 현실과 화해하며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욕망 표출이 가장 병리학적으로 나타난 것이 신경증의 형태이고, 가장 일상적인 형태가 꿈과 실수, 가장 조화롭고 바람직한 표출이 예술에서의 승화와 문학에서의 상상력일 것이다. 프로이트가 다양한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대하고 발견한 것은 바로 욕망 충족의 새로운 길이 아닐까? 꿈이 욕망의 위장된 충족의 1차적 전략과 전술에 머물고 만다면 예술 작품은 그 욕망의 다소간 승화된 충족의 방식과 형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충족 방식의 변화는 단순히 욕망과 충동들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것이고, 인간의 자기 이해와 자기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 아닐까?
무의식은 일종의 알 듯 모를 듯한 메시지 저장고와 같다. 곧장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 메시지를 알 수 있다면 해석은 필요 없어지지만, 정녕 알 수 없다면 무의식은 의식에게 상관성 없는 영역으로 남게 된다. 우리는 이 피할 수 없는 양극단의 대척점으로서 의식과 무의식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의식은 무의미의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의미의 장에 속해 있다. 그것은 의식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독립적인 절대적 타자라기보다는 서로 관여하고 보완하는 상대적 타자라 해야 할 것이다.
윤성우 / ‘서양 철학 이야기4’중에서(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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