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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 기억 꿈 사상

송담(松潭) 2008. 1. 15. 14:16
 

 

카를 융 - 기억 꿈 사상

마음의 거대한 뿌리를 캐려한 ‘심리학 광부’

 

 


누가 나로 하여금 나 자신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어떤 것을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는가? 이 무서운 의지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열두 살 소년이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표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림자’였다. 소년을 단 한순간에 사로잡은 그림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로 꿈에 나타나 ‘공포의 뿌리’를 심어버린 그림자. 자명·완전·지고지선의 상징인 신의 존재조차 회의로 몰아넣은 그림자. 밤마다 ‘꿈의 노동’에 시달리다 정신 발작까지 일으키도록 한 그림자.

그림자는 우리 의식, 곧 자아의 뒷면이며 그늘이다.

무의식의 변방인 까닭에 의식과 가장 가까우며,

자아와 그림자가 만나는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하지만 그 꽃은 ‘불꽃’인 까닭에 열렬한 감상이 아니라

조심스런 탐구의 대상이다.

이후 소년은 ‘갚을 길도 없이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그것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70여년을 매달리게 된다. 그 자신 훗날 말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 인간 심리의 ‘거대한 뿌리’를 캐려 생애를 기울였던 ‘광부’. 오직 이성과 경험이라는 도구만을 양손에 들고 ‘마음의 오지’를 헤맸던 ‘탐험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인간성의 회복을 바랐던 평화주의자. 정신질환을 겪는 환자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이해하려 했던 의사. 그리고 무엇보다 분석심리학의 비조인 그의 삶을 엮은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이 새로 번역 출간됐다. 언어로 빚은 융의 초상은 백발의 그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만다라(부처의 증험을 보인 그림)처럼 다채롭다.


개념만으로 뜯어보면 융의 분석심리학은 간결하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이라 할 페르소나.

페르소나와 무의식을 맺는 고리인 ‘자아’.

의식의 대극으로 상정되는 무의식. 둘의 접점에 놓인 그림자, 곧 의식의 뒷면. 남성 무의식 속의 여성성인 아니마.

그 반대의 경우인 아니무스.

개인 무의식을 넘어 보편적 인간성의 원초적 조건인 원형.

원형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양상으로, 꿈·종교·만다라 등으로 표현되는 ‘상징’.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구심점인 ‘자기’.

전체의 인격에 다다르려는 필연적 요구를 이르는 ‘자기 실현’. 덧붙여, 자아의 기능을 감각·사고·감정·직관으로 나누고, 심리적 에너지의 방향을 외향·내향으로 가른 뒤 이를 서로 연결하면 8가지 심리적 유형이 구성된다


하지만 이런 개념화를 융은 극도로 경멸했다. 심리학의 출발은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서 어찌 타인의 마음을 분석할 수 있겠는가. “오직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으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해답도 찾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것은 개념화를 넘어 ‘인간성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이러해야 노년의 융이 〈노자〉를 빌려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와 두 차례 만난 추억은 차라리 삽화적이다. 당대 다수의 비난을 무릅쓰고 프로이트를 옹호하며 마음 깊이 그를 존경했으나 ‘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 ‘이론을 교리화하려는 비과학적 태도’ 등에 질려 5년 만에 결별하고 만 일.


 프로이트는 융 앞에서 두 차례나 실신했는데 모두 ‘부친 살해에 대한 환상’이 원인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설명. 7주 동안의 미국 여행 동안 단짝처럼 지내며 서로의 꿈을 분석해주는 열의를 나눴지만, 진리보다 개인적 권위를 앞세우는 프로이트의 태도에 실망했다는 추억 등이 간략히 묘사돼 있다.


 두 사람의 갈라짐은 심리학 연구에서 프로이트가 ‘완전함’을, 융이 ‘온전함’을 추구한 사정도 한몫했을 것이다. 완전함은 선명하되 독단으로 흐르기 쉽지만 온전함은 극단을 아우르며 전체를 지키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실전문제 풀이. 한 여인이 말한다. 그는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다.(프로이트는 융에게 이 여인의 사례를 듣고선 ‘당신은 어떻게 이토록 추한 여성과 며칠이고 함께 지내는 일을 참아낼 수 있었단 말이오’라고 되물었다) “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이중공업학교다. 나는 옥수수가루 바닥 위의 자두과자다. 나폴리와 나는 세계를 국수로 돌봐주어야 한다.” 이 문장들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상상해 보라. 비루한 출생, 가난한 집, 부당한 처우, 고통, 분노, 열등감, 생존욕, 보상심리…. 융은 말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실로 그렇다.


전진식 기자 / 2008.1.15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