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오성/인식체계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인간의 인식에는 단지 이 두 개의 근본적인 줄기만이 있다.”다고 하면서 두 개의 근본적인 줄기는 감성과 오성이라고 했다. 감성(感性)이란 우리의 정신이 감각(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을 통해서 대상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오성(悟性)이란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내용들을 정리하여 개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감성과 오성은 경험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능력이며 감성과 오성은 각각 고유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칸트는 이것들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정신의 형식이라는 뜻으로 ‘본유형식’이라고 불렀다.
칸트에 의하면 감성과 오성, 이 두 정신이 손을 잡음으로써 우리는 대상을 알아본다(인식한다). 우선, 감성이 감각기관에 의한 경험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인다. 그 다음 받아들인 내용에 오성이 사고를 통해 개념을 적용시킨다.
칸트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경험이 없는 사고는 텅 비었고, 사고 없는 경험은 눈멀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내용 없는 사고’는 예컨대 눈(雪)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아프리카 사람에게 눈(雪)이라는 개념에 대해 가령 ‘하늘에서 나풀거리며 천천히 내려오는 하얗고 차가운 어떤 것’이라고 설명한들, 그 사람이 눈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그는 눈을 (雪)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경우를 ‘공허하다’라고 했다.
이에 반해, ‘개념 없는 직관’은 이렇다. 조금 전 그 아프리카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나풀거리며 천천히 내려오는 하얗고 차가운 어떤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하자 그는 그것을 손바닥에 받아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의 정신에는 눈(雪)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런 경우 ‘맹목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가 눈을 알아볼 수 있으려면 눈에 대한 경험과 눈이라는 개념, 이 둘 모두가 필요하다. 그래서 칸트는 경험과 사고,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지식은 우선 경험을 통해 얻어졌기 때문에 종합판단이다. 게다가 감성과 오성이라는 선천적인 본유형식에 의해 정리되었기 때문에 선천적이다. 곧 선천적 종합판단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인식질료를 감성과 오성이라는 본유형식에 의해 짜 맞추는 구성행위이다. 즉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가 가진 지식이란 그 대상 자체에 대한 지식이 아니고 우리의 정신에 의해 구성된 지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정신에 나타난 대상’이다. 칸트는 대상 그 자체를 ‘물자체’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에 나타난 대상을 ‘현상(Erscheinung)'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정신이 구성한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물자체’에 대해서 영원히 알 수 없다.
어느 사람이 벗을 수 없는 푸른 안경을 쓰고 태어났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세계가 푸르다고 생각할 것이며, 영원히 ‘세계 그 자체’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는 그 푸름은 세계로부터 오지 않고 안경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언젠가 칸트의 ‘푸른 안경 비유’를 떠올리게 하는 TV광고가 있었다. 빨간 안경을 쓰고 있는 딸이 “엄마, 라면이 빨개요!” 라고 하자, 어머니가 “안경을 벗어!”라고 한다. 그러자 다시 딸이 “그래도 빨개요.”라고 대답한다. 이 TV광고에서 딸이 부닥친 문제는 안경을 벗어도 라면이 노랗지 않고 실제로 빨갛다는 데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제는 이와 달리 칸트가 말하는 푸른 안경, 곧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쓰고 있는 이 안경을 잠시도 벗어 버릴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이렇듯 벗어 버릴 수 없는 안경과 같은 ‘본유형식’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서 ‘합리적 체계’로 우리에게 나타난 객관적 지식을 칸트는 ‘하나의 섬’이라고 비유했다.
김용규 / ‘철학 통조림4’중에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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