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디아스포라(Diaspora)

송담(松潭) 2008. 1. 14. 10:30
 

 

다민족 사회와 디아스포라



 인간은 살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수많은 고통스러운 경험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디아스포라(Diaspora)'다. 디아스포라는 역사적 격변이나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태어나서 자란 곳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그 집단을 의미하는 말이다.


 원래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떠도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고국을 등져야 했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총칭하는 단어로 확장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를 피해 만주나 북방으로 이주한 조선인 후손인 중국 조선족과 러시아 카레이스키, 독일에 광부나 간호사로 가서 그곳에서 살게 된 사람들과 그 2ㆍ3세들, 알로에 농장 인부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중남미 한인들, 입양아로 나라를 등져야 했던 수많은 코리안들이 모두 디아스포라에 해당된다.


 한국에 와서 디아스포라가 된 사람들도 있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가난에 등 떠밀려 한국에 와서 오랜 기간 살고 있거나, 한국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삶을 영위하는 동남아 여성들도 디아스포라다. 디아스포라의 아픔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만큼 고통스럽다고 한다.


 인간에게 고국과 고향이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1963년 영국 범죄 사상 가장 대담한 강도사건인 대열차강도사건이 일어난다. 강도 15명이 우편열차를 사제 신호기로 세우고 15분 만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인 360만파운드(약 68억원)를 강탈한 사건이었다. 주범이었던 로니 빅스는 사건 후 체포되어 3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65년 탈옥에 성공한다. 여기저기 도피생활을 하던 빅스는 영국과 범죄인인도조약을 맺지 않고 있던 브라질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빅스는 브라질에서 새 생활을 시작한다. 브라질 여성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영화 같은 과거 때문에 유명인사도 됐다. TV에 출연해 영국 사법당국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그가 2001년 71세 나이로 35년에 걸친 도피생활을 접고 영국으로 돌아와 사법당국에 자수한다. 언뜻 생각하면 어이없는 행동이다. 삶을 정리해야 할 나이에 체포될 위험도 없는 브라질을 떠나 가족까지 버린 채 자기 발로 감옥으로 갔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런던공항에 내리자마자 체포된 빅스는 왜 자수를 결심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 고향 리버풀 선술집에서 맥주 한잔 마시고 싶었어요."


범죄자 이야기를 꺼내서 좀 느닷없기는 하지만 고국을 떠난 사람들 마음 속에 얼마나 큰 고통과 갈망이 상존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디아스포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인도적인 눈길을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디아스포라 문제가 이제 모든 나라에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일어난 이천 냉동창고 화재사건 희생자 40명 중에 20명이 중국 동포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왠지 더 가슴이 아픈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중국에서도 유이민이었고, 다시 돌아온 고국에서도 유이민이었다. 기구한 디아스포라인 그들은 결국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참혹한 사고의 희생자가 됐다. 여기서 그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 범위나 법적 지위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이제 우리도 다문화 사회를 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현실이라는 지적을 하고 싶다. 사실 '다문화 사회'는 디아스포라에서 시작된다. 지금부터라도 개념조차 생소한 디아스포라에 눈길을 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단일민족사관을 주입받은 우리는 특히나 디아스포라에 대한 개념이 없다.


재일동포인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이나 헝가리 이민자의 아들로 프랑스 대통령이 된 사르코지도 디아스포라다. 디아스포라를 우리 사회에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허 연 /문화부차장

(2008.1.14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