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story

사랑이라는 권력

송담(松潭) 2020. 10. 23. 05:42

 

50년을 묶어둔 사랑이라는 권력

- 마르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 -

 

 그 누구도 연인의 살(flesh)을 그 자체로 사랑할 수는 없다. 애무는 정육(精肉)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해부학적 탐색도 아니다. 그렇다고 애무와 살 속에 레비나스(E. Levinas)류의 은현한 신학을 숨겨둘 노릇도 아니다. 카시러나 엘리아데의 말처럼 사람이 워낙 상징적 동물(homo symbolicus)일진대, 그 살은 이미 말과 섞여 있다.

 

‘말이 없는(억압된) 살’은 강간이거나 해부이거나 시애(necrophilia)다. 그리고 그 먼 반대편에는 말과 살이 한데 어울리며 스파크를 일으키는 인간적인 사랑의 무상한 쾌락이 자리한다. 말은 워낙 사랑의 구성성분이지만, 살의 매력이 드센 연애의 초기에는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연인의 살이 이윽고 고기(肉)로 느껴질 때,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밖에 없다(나는 그것을 ‘존재론적 측은지심’이라는 개념으로 몇 차례 해명한 바 있다).

 

 인간의 사랑은 워낙 어리석은 짓이긴 하지만, 무릇 사랑의 현명함을 가꾸려는 이들이라면 살과 말이 섞이는 묘경(妙境)의 이치에 세심해야 한다.

당연히 지식인들의 사랑과 우정에서 말의 무게는 가중치를 얻는다. 전술한 보부아르-사르트르의 경우에도 말은 사랑의 묘약이었고, 서로의 육체가 상한 고기처럼 삭아갈 때에도 그 빛나는 말의 향연 속에서 관계의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

 

 대개 살이 연정을 부르긴 하지만 그 살에 탐닉하는 것은 산망스러울 뿐 아니라 실로 치명적이다. 그래서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에서는 살 이후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긴요하다. 보부아르-사르트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아렌트(1906~1975)-하이데거(1889~1976)의 경우에도 말을 가운데에 두는 ‘지적 반려’가 그 관계의 알속이었다.

 

30대 중반의 하이데거는 이미 사계의 명망을 얻은 탁월한 강사였고, 한나 아렌트는 그 재능을 따랐던 빛나는 눈동자였다. 지적 교류라는 관심으로 변형되어 유지되는 가부장적 지배로서 선생과 학생 사이의 연애만한 것도 없으리라. 하이데거는 첫 수업에 든 아렌트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으며 즐겁게 회고하곤 했다. 시골 촌놈티가 역력한데다 마치 통나무에 총기있는 구슬 두개를 박아 놓은 듯한 외모의 하이데거에게, 이국적인 풍모와 우아하고 활수한 태도를 지닌 10대 후반의 아렌트는 매력적인 ‘현존재’였음에 틀림이 없다.

 

 똑똑하고 자립적인 여학생이 똑똑하고 권위적인 남선생 속에서 연인을 키우는 방식은 무엇일까? 더구나 그 선생에게 이미 아내라는 기득권이 있다면? 불안정한 지위 속에서 허든댈 수밖에 없는 그 여학생의 위태로운 사랑을, 그 아내와 ‘함께’ 그러나 그 아내를 ‘넘어’ 건사할 가능성은 무엇일까? 이미 30여 개월의 애무를 끝내고 눅진해진 아내의 살을 대신할 새 살일까? 그러나 불륜의 낙인을 감수한 채 탐닉하는 젊은 여학생의 살이 과연 늙어가는 아내의 살을 대신하는 비용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보수적이며 무뚝뚝하고 가사에 치밀했던 전형적인 독일여성 엘프리데 하이데거의 바깥에서, 한나 아렌트라는 명민하고 당당하며 영감에 찬 여성 지식인에게서, 하이데거가 찾은 것은 무엇일까?

 당대 최고의 철학적 지성 하이데거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던 나치-현인(賢人) 야스퍼스를 절망케 했던 바로 그 나치-답게 자기 생각 속의 완벽한 틀에 얹혀 오만하게 군림한다. 그것은 17살 연하의 여학생 한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그녀가 국제적 명성과 인정을 받은 이후에도 하이데거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학생’처럼 대하곤 했다.

 

 아렌트에게 하이데거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자 권력이었다. 매력과 권력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세속이지만, 오직 사랑의 환상만이 그 일치의 환상을 선사한다. 하이데거의 정치적 신념을 때로 모질게 비판하면서도, 야스퍼스가 철학적으로 그에게 이끌렸듯이 아렌트는 그 시원(始原)의 연정 속으로 도리없이 미끌어지곤 했다. 그 사이, 하이데거는 사랑의 권력을 관철시켰고, 권력의 사랑을 즐길 수 있었다.

 

 특별히, 그 누구도 포획할 수 없을만치 투철하고 독립적인 여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이데거의 지적 자만을 충족시켰다. 근 50년에 걸친 연애 기간 내내 아렌트는 마치 여학생처럼 그의 방식대로 만나고 그의 뜻대로 기다리며 초기의 독일식 사제(師弟) 관계를 강박적으로 반복했다.

 

그 반복을 정당화한 동기의 바탕에는 은밀한 지적 소통의 확신이 있었다. 다변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프랑스적 관계와는 달랐지만, 하이데거에 대한 아렌트의 사랑에도 ‘지적 반려’의 믿음과 열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이 세기의 사상가를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그녀만이 그의 뮤즈(muse)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정치윤리학적으로 상극을 달렸던 이 두 연인의 밀애를 가능케 했다.

 

살이 식고 삶의 양식이 달라도, 정신적 반려의 동질감에 대한 확신은 무섭도록 상대를 고집하는 법!

 

김영민/전주 한일대학교 교수·철학

출전 ; 2006. 9. 1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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