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story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송담(松潭) 2021. 11. 13. 17:47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지교헌

 

 이미지 출처 : yes 24. com

 

 

 모니터 앞에 앉아 이것저것 기웃거리다보니 “The Saddest Thing"이라는 음악이 나타났다. Melanie Safka가 부른 노래였다. 음악의 가사를 살펴보니 침묵의 작별 인사를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라고 하는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이런 저런 잡념이 일었다.

 

 세상에는 슬픈 일도 많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결코 우연히 생긴 말이 아니고 그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신화와 전설과 예술과 철학이 만연하고 있다. 만일 인간이 슬픔을 잊지 못하고 견디지 못한다면 하루도 마음이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며 날마다 낙담과 실의의 비극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형형색색의 염세주의가 도사리고 있으며,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존엄성을 여지없이 짓밟고 수많은 사람의 귀한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기도 한다.

 

 오늘 내가 발견한 노래는 다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슬픔에 관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슬픈 일들이 수없이 지나가고, 또한 머물러 있고, 앞으로도 닥아 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 자신과 가정과 사회에서 슬픈 일을 맞이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지만 특히 젊은 시절에는 남녀 사이의 인연에서 가슴 아픈 슬픔을 겪기도 한다.

 

 나는 한 때 몇 사람의 처녀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고백한 일이 있었다. 그저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용솟음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거의 쓸쓸하게 끝나고 말았다. 달아나는 사람을 열심히 따라가다가 지치고 마는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실패를 여러 번 거듭하다보니 세월도 많이 흐르고 종당엔 기쁨과 성공도 찾아오는 듯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오는 보람이었다. 나는 성공에서 오는 희열을 느끼고 아름다운 꿈을 꾸게 되었다. 나의 프로포스를 거의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순진무구하게 보였다. 당시 나는 대학에서 조교 겸 강사로 근무하였고 지방의 언론매체에 투고도 자주 하여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처지였다. 그러나 나는 이 때 이른바 노총각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측은한 시선을 받는 처지이기도 하였고, 나의 수입은 풋내기 교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속빈 강정이었다. 매월 하숙비를 해결하는 것이 고작이고 배가 고파도 말없이 참기만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해하고 나의 뜨거운 마음을 받아들이려는 여인이 나타나게 되어 행복하였다. 그는 내가 본 어느 여인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고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었다. 나는 그를 백조라고 생각하였고 진실로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에게는 잠시뿐이었다. 6.25사변을 겪으면서 실시된 징병제도에서 오랫동안 현역병입영연기상태로 있던 병역문제가 갑자기 제기된 것이었다. 연애고 결혼이고 모두 포기하고 당장 병역을 마치기 위하여 입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행운의 여신이 보내주신 나의 백조를 맞이하기엔 너무나 힘겨운 형편이었다. 결국 나의 행복은 하나의 백일몽처럼 지워버리고 아름다운 기억은 허공 속으로 날릴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게 되었다. 뒤늦게 병영(兵營)을 찾아가는 나에게 닥쳐올 미래는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가장 모험적인 운명과 마주치게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며칠을 고심하던 나머지 나의 백조에게 영원한 작별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나의 욕심대로 그를 붙잡으려는 것은 불행을 은폐하고 그에게 커다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게 되고, 기필하기 어려운 인생문제를 결단하지 않고 입영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행위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이때 헤어날 수 없는 늪 속에 빠져서 방황하는 포로가 되어 있었고 도무지 탈출할 계책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입영은 연기되고 계절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어떠한 고통과 희생과 불행을 강요하더라도 작별을 취소하기로 작심하였으나 마음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深淵) 속에 갇히어 완전히 방향을 잃고 있었다. 변덕의 악마로 변신한 나는 드디어 취소하였던 작별을 다시 되돌리고 말았다. 하나의 미치광이가 침몰하는 난파선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보다도 더 한층 어지러운 모습이었다. 나의 무능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나의 백조는 힘겨운 충격과 고뇌를 극복해야만 하였다. 너무나 순결하고 고결한 그는 미치광이의 정체를 분명히 파악하게 되었고 드높이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는 머지않아 자신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이상향을 찾아 우아하게 정착하였다.

 

 그로부터 어느 듯 50여 년이 흐른 이제 와서 나는 “The Saddest Thing"을 발견하고 눈시울을 적시게 되었다.

 

 하늘아래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당신이 사랑했던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삶, 나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것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는 것일 겁니다.

 ……. …….

 하지만 울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

 하늘 아래 가장 큰 슬픔이 있다면

 그건 아마 당신이 사랑했던 것들과

 말없이 작별하는 것일 겁니다.

 ……. …….

 

그는 내가 얼마나 미친 사람인지도 알겠지만 그 반면에 얼마나 순수하고 진실하고 우직하였는지를 알아 줄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방황은 결코 나의 사리사욕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극한 희생과 순결에서 빚어진 아름다운 사랑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슬픔은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이다.

 

 그에게 미치지 않으면 던질 수 없고,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던질 수 없었던 나의 작별인사는 나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슬픈 인사였다고 믿는다. (2016.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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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교헌(일명; 지대용)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한국공무원문학협회,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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