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story

수모루 할아버지

송담(松潭) 2019. 11. 11. 06:10

 

 

수모루 할아버지

 

 

 

 

 

 내 나이 열다섯에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넘어왔지. 꼬박 닷새가 걸렸어. 고생은 말도 마. 안 해본 장사가 없으니까. 육이오 나던 해 부산에 내려갔는데 그 때부터 큰돈을 만지기 시작했어. 국제시장에서 돈 제일 많이 번 사람이 나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여기 저기 집 사고 땅 사고, 원도 한도 없이 살았지. 별장도 몇 있었는데 항공사 사장이 하도 팔라 해서 얼마 전에 마저 팔었어. 마누라? 강남에 살지. 지금 구십이야. 나랑 동갑이지. 떨어져 살면서 가끔 안부만 물어. 아침에도 통화했어. 그 사람은 서울이 좋고 나는 여기가 좋으니 각자 좋은 데서 사는 거지. 취향이 다르니까.

 

 내겐 여기 수모루가 천국이야. 여기 이 안락의자에 앉으면 호숫가 야자나무들 사이로 범섬이 정면으로 바라다보이거든. 그거 내다보며 커피 한잔 마시는 기분, 그게 낙원이야. 들어올 때 풍산개 다섯 마리 보았지? 그놈들 밥 주고 바닷가 산책하고, 아까처럼 비 오고 난 후에 올라오는 미역 건져다 먹고. 자연미역이라 고기보다 맛있거든. 심심하면 컴퓨터 장난도 치고, 뭐 그러면서 살아. 답답하면 차 몰고 서귀포 한 바퀴 돌아오기도 하고.

 

 서귀포에 여자 친구가 있어. 나보다 열다섯 살 아래, 지금 일흔다섯이야. 그 사람이랑은 그냥 친구야. 손밖에 안 잡았어. 그래서 오래 가는 것 같아. 안 그러면 벌써 끝났을 거야. 좀 전에도 만나 점심 먹고 왔지. 내가 한번 내면 자기도 꼭 내려 하는데 내가 남자니까 더 많이 내야지. 늙으면 애써 사람을 만나야 해. 그렇잖으면 맥 빠져서 못살아. 외로움이라는 것, 꽤 고약한 감옥이거든. 내일은 청주 다녀오려 해. 이맘 때 거기 옻나무 순이 좋아. 부탁해 놓았더니 구해 두었다 해서. 아침 비행기로 갔다가 여섯시 비행기로 돌아오려구.

 

 여자? 젊은 날에, 마누라 말고도 둘 있었지. 십 년, 칠 년씩 살았어. 난 어쨌건 여자들을 울리지는 않았어. 여자의 눈물은 하느님이 기억하신댔잖아. 칠 년 산 여자와 헤어질 때에도 트럭 세 대분을 따라 보냈지. 헤어진 뒤에 용돈 달라 찾아와도 그냥 보낸 적은 없어. 마누라? 우리 마누라는 부처야. 돈만 갔다 주면 두 말도 안했어. 애들 잘 키우고. 일생 돈 걱정은 안 시켰으니 남자란 다 풍운아라 싶었겠지. 그 여자들 사랑했냐고? 몇 년씩 데불고 살았으니 일시적인 감정은 아니었을 거야. 사랑했다 싶었는데. 어쩌면...... 바람이었을지도 몰라. 머무는 듯 스쳐가 버리는, 사랑도 인생도 바람 아닌가?

 

 

최민자 / ‘손바닥 수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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