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지대용 / ‘질풍 속에서 피는 꽃’(한누리 미디어 출판)중에서

송담(松潭) 2022. 12. 20. 08:27

지대용 / ‘질풍 속에서 피는 꽃’(한누리 미디어 출판)중에서

 

 

 

 

< 1 >

 

광복 이후 학원가에서 주목할 만한 일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마저 이념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는 사실이었다. 8.15 이후 노골화하였던 좌익세력은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된 이후 강력한 우익세력 앞에서 몸을 사리고 피신하거나 더러는 월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좌익단체에 가입한 사실은 극비에 부쳐지고 지하조직의 형태로 명맥이 유지되었다.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시골마저 좌우세력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는 대혼란은 학원내의 학생과 학생의 대립에 그치지 않고 교사와 교사의 대립과, 학생과 교사의 대립도 일어났다. 우익학생들은 좌익교사들에 대한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좌익학생들은 우익교사들에게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제관계는 전통적인 사제의 윤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완전한 적대관계로 발전하여, 사느냐 죽느냐 하는 극단적인 벼랑으로 치닫기도 하였다. 이러한 개별적인 적대관계는 개별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집단적인 적대관계로 쉽사리 전환되어 익명의 구조 속에서 서로의 생명을 위협하는 투쟁으로 진행되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빚어진 비극은 정치지도자들의 암살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정치적 암살사건은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그 내막이 충분히 밝혀지지 않아 이러쿵저러쿵 추측이 무성할 뿐, 사건의 전모가 남김없이 규명되기 어려웠다. 증거 없는 추측과 상상은 진실과 멀고 사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빚기도 쉬운 것이었다.

 

 

< 2 >

 

인민공화국의 인민군대는 단시일 내에 대구와 부산까지 완전히 점령한다는 소문과는 달리 낙동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가 완전히 궤멸되어 국군은 싸울 기력이 없어졌다는 말도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보였다. 밤에는 계속하여 파괴된 도로와 교량의 복구사업이 진행되고 군수품과 식량을 수송하기 위한 인력이 동원되었다.

 

들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였다. 농부들은 UN군의 공습을 피하여 열심히 농사를 지었지만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아니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한국의 농부들은 하얀 옷을 입기 때문에 UN군의 폭격기도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비전투요원으로 인정하고 공습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제 1차 의용군 입대에 이어 2차 입대와 3차 입대가 추진되는 동안 전쟁은 장기전으로 들어가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는 인민군의 행렬이 북쪽을 향하여 이어졌다. 곧고 넓은 도로를 피하고 구불구불하고 좁은 시골길을 통과하는 것은 공습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지만 행색이 초췌한 모습들은 사기가 꺾인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조용히 마을을 통과하였다. 어두운 밤에도 행렬은 이어졌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튿날 날이 밝자 10리 밖으로 보이는 국도에는 많은 군용차량들이 굉음과 먼지를 일으키며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밤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UN군이 인천을 상륙하고 국군은 반격하여 올라오고 있는 중이라고 쑥덕공론이었다. 이제 인민공화국의 체제는 끝났다는 것이다. 인근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박달원 장로가 집으로 돌아왔다. 퇴각에 바쁜 인민군들이 반동분자로 연행하여 교도소에 감금하였던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달아났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생활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2개 사단의 미군과 5,000명의 한국해병대는 9월 15일 새벽에 인천의 월미도에 상륙하고 다음 날에는 인천을 탈환하였으며 미군과 한국군은 서울을 탈환하기 위하여 진격한 까닭에 북한 인민군부대는 중부 및 동부의 산악지대로 패주하는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9월 28일에는 서울이 완전히 수복되고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것이었다.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포로가 된 인민군은 벌써 12,5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배당되었던 전답들은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고 마을은 가벼운 흥분 속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인민군대의 파죽지세는 석 달만에 38선 이북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 3 >

 

그 동안 국군과 UN군은 북한의 평양과 순천, 함흥과 같은 도시를 모두 점령하고 정거동, 구성, 운산, 초산, 장진호, 부전호, 신갈파진, 혜산진. 백암, 청진으로 진격하였다.

 

미국의 맥아더 UN군사령관이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만났던 웨이크 회담에서 그 해 추수감사절이 되는 11월 23일까지는 북한군의 군사적 저항이 끝나리라고 말한 예언은 틀림없이 적중할 것만 같았다.

 

비록 일부의 군사력이기는 하지만 한국군의 진격이 압록강에 이르렀으니 그 누가 맥아더의 예언을 믿지 않을 수가 있었으랴.

 

그러나 일부의 군사전문가가 염려하였던 것처럼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이라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맥아더의 예언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중공은 벌써 10월 9일의 북경방송을 통하여 UN군의 38선 돌파를 허용한 10월 7일의 UN결의는 위법이며, 미군의 북한진입은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고 중공은 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그리고 중공은 이른바 '의용군'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웨이크 회담이 끝난 다음 날인 10월 16일, 일시에 3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한국전쟁에 투입하고 말았다. 중공은 '항미원조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衛國)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는데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원조함으로써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0월 24일에는 한국군 제 6사단이 청천강 상류에 있는 운산에서 중공군으로 보이는 적군에게 포위당하고 6사단을 도우려던 미군 제1기병사단도 26일에 포위되어 고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중공군의 개입은 미군과 UN군의 전략을 어렵게 하였다. 자칫하면 소련군도 개입할는지 모를 판이며 국제법상의 문제도 제기될 수 있어서 될 수 있으면 UN군의 중국 국경 접근을 삼가지 않을 수 없었고 다만 한국군만의 국경접근을 용납하는 데 그치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전쟁은 장기화할 조짐을 보였다. 미국 정부에서는 중공군의 개입에 대하여 점점 유화적인 대응을 나타내면서 적당한 시점에서 휴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맥아더사령관은 UN이 제한전쟁이라는 전략을 버리고 중공연안지역이나 내륙까지 전쟁을 확대하면 중공은 군사적 붕괴의 위험에 봉착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전략을 공언함으로써 미국 정부에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6·25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은 재래식 무기에 징을 치고 피리를 불며 인해전술로 다가왔다. 그들은 주로 동북삼성(東北三省, 만주지역)에 사는 조선족 동포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또 하나의 동족상잔에 동원되어 목숨을 걸게 된 것이었다.

 

청천강 일대에서 총공격을 시도한 중공군은 인민군과 함께 남으로 남으로 진격하여 1951년 1월 4일에는 UN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되어 1·4후퇴' 라는 역사적인 용어가 생기게 되고 25일 경에는 평택 장호원 제천 단양 영월 삼척을 잇는 전선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에서 사용하는 '1·4후퇴' 라는 낱말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한 대역전의 모든 전세를 통틀어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1·4후퇴야말로 UN군만의 후퇴에 그치지 않고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북도를 주로 하는 3.8선 이북의 북한주민을 대량적으로 남하하게 하여 온 나라가 피란민의 행렬로 가득하게 하였다.

 

이른바 '남부여대' (男負女戴)라는 말은 6·25 사변에서 나타난 피란민의 행렬에서 실감하게 되었다.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죽을힘을 다하여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는 행렬을 보고 미국 릿지웨이 장군이 '세계 역사상 최대 비극의 행렬’ 이라고 탄식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하였다.

 

피란민들은 그 머나먼 길을 걸어서 내려오다가 병이 나서 쓰러지고, 굶어서 쓰러지고, 도로를 가로지르려다 군용트럭에 깔려 죽기도 하고, 간첩으로 오인되어 체포되기도 하고, 폭격으로 죽기도 하였다. 어떤 어린이는 길바닥에 쓰러져 숨이 끊어진 어머니의 가슴팍을 헤치며 젖을 빨다가 지쳐 쓰러지기도 하였지만 구원의 손길이 미칠 수가 없었다.

 

전쟁이야말로 인류의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악이며 비극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아무런 죄도 없이 굶주리고 피를 흘리고 무참히 죽어 가는 전쟁이야말로 천인이 공노할 죄악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야말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 4 >

 

38선이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한민족으로 하여금 형제 자매와 부모자식간에 서로 총칼을 들이대고 싸우는 어리석고도 야만적이고 비참한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단 말인가. 38선이 그어진 것은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전세의 주도권을 장악한 연합국측이 마지막 군사작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협의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단행할 뜻을 밝히고 9월 2일에는 미국 육군태평양지역총사령관 맥아더가 총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를 포고함으로써 종전에 논의하던 내용에 따라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초에 논의된 38선은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설정되었던 것인데 3년 후에는 동서 냉전의 조류에 휩쓸려 정치적 분계선으로 완전히 변질하고 말았다.

 

북한측은, 한국의 통일을 위하여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파견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의 입북을 거절하고, 해방 직후 38선을 넘나들며 간헐적으로나마 이어지던 인원과 물자와 우편 등의 교류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이에 따라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국제연합의 승인과 관리 밑에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어서 9월에는 북한에서 소련 당국의 정치적 영향 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38선은 완전히 국경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이렇게 국경으로 고착화한 38선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소멸되었으나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정전협정)으로 휴전이 성립됨으로써 휴전선이 38선을 대체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38선의 등장은 1945년 8월 8일 갑작스런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만주를 휩쓸며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한 소련군이 한반도의 전역을 점령하여 공산화할 가능성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관계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제안한 38선은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그 목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연합의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소련과 북한측의 전략에 따라 국경선으로 변질하였다는 것이다.

 

< 5 >

 

대수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제 1면 중간에 1호 활자로 찍힌 굵은 글자를 응시하였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이었다. 1951년 2월 5일 새벽, 거창군 신원면 과장리에 공비가 나타나 경찰관 파출소를 습격하여 쌍방의 전사자가 30여 명이나 되었고 보병 제11사단 9연대 제3대대는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경남 거창군에 진주하여 2월 10일과 11일 양일간에 걸쳐 무려 오륙백 명이나 되는 양민을 학살하였다는 것인데 학살의 이유는 공비와 내통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후의 사건에 대하여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은 '군에서는 아무런 경고도 없이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젖먹이로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 327명을 포함하여 최소한 570명을 총살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시체를 휘발유로 태운 다음 산에 묻었다. 죽은 사람의 성별을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많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들이 빨치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국회에서는 조사단이 구성되어 현지에 파견되었으나 당시의 계엄사령관은 미리 공비를 가장한 군인과 경찰을 매복하였다가 조사단에게 총격하는 방법으로 현지조사를 저지하기도 하였다는 것이었다.

 

대수는 기사를 읽으며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이 신원면 과장리에서 경찰관 파출소를 습격한 공비들과 내통하였다는 증거는 명백히 드러나기도 어렵고 또한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극히 일부의 주민들에게 해당할 것이며, 또한 일시적으로 공비들에게 협력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협박과 공포분위기 속에서 부득이하게 저질러진 일이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젖먹이들로부터 16세까지의 어린것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공비 토벌은 당연하지만 공비가 아닌 양민을 공비와 내통하였다는 불확실한 혐의를 근거로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무차별하게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법부의 판결도 없이 함부로 사람의 생명이 빼앗기는 무법천지였다.

 

공비들의 대부분은 국군과 UN군의 전면적 반격에 따라 패잔병이 되어 남한의 각 지역에서 산악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대낮에는 깊은 숲 속이나 동굴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어두운 밤에는 마을에 내려가 식량을 약탈하거나 경찰관 파출소와 같은 관공서를 습격하여 민심을 교란하기도 하였다. 특히 해발 1,218m나 되는 백운산과 1,915m나 되는 지리산은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에 진격하였던 인민군의 패잔병이 북으로 퇴각하지 못하고 모인 곳이었고 게릴라전을 펼치기에 유리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따라서 공비를 토벌하는 한국군이나 경찰은 쉽사리 공비토벌의 전과를 올리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리하여 공비가 출몰하는 마을의 주민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낮에는 국군에게 협력하고 밤에는 공비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 6 >

 

휴전회담에서 포로교환문제가 논의되자 1951년 8월 이후부터 친공포로들은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반공포로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친공포로들은 이른바 인민재판이라는 형식으로 반공포로를 위협하였는데 이러한 친공포로의 행위는 포로재분류심사와 반공포로의 분리수용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고 종국적으로는 휴전회담에서 포로교환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공산측의 작전이었으며 돗드 포로수용소 소장을 납치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5월 7일 아침 제10수용소의 공산포로 대표들이 포로수용소 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하자 돗드 소장은 포로 대표들을 정문 밖으로 나오게 하였는데 그들은 종전과 다름없이 식량 피복 약품 등과 같은 물자를 더 많이 배급해 달라고 요청한 다음, 포로교환을 위한 심사중지와 휴전감시를 위한 중립국으로 소련을 수락할 것 등을 제의하고 돗드 소장이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그를 수용소 안으로 납치한 것이었다.

 

이에 UN군사령관 릿지웨이는 미제8군사령관 밴플리트에게 무력을 행사에서라도 폭도화한 포로들을 즉시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리하며 1,000여 명의 전투원과 상당수의 탱크를 거제도에 투입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산포로들은 만일 군이 무력을 행사한다면 돗드 소장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그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포로학대사실을 인정하고 더 이상 강제적인 포로송환심사를 하지 않으며 공산군포로대표단 구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미군 당국은 신임소장 콜슨으로 하여금 포로들의 주장을 일부 완화시켜 수락하게 함으로써 돗드 소장을 구출하기에 이르렀다. 1951년 말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공산군과 중공군의 포로는 132,472명이나 되었는데 만일 그들의 일부가 송환을 거부하게 되면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이 퇴색하게 되고 전반적으로 사기가 저하할 것을 공산군측은 염려하였다.

 

실제로 개인면접을 통한 심사 결과로는 귀환을 거부하는 공산군측포로가 무려 60,000명이나 되었다. 이 무렵 공산군측은 특별히 훈련된 공작대원을 전선에서 고의로 포로가 되게 하여 포로수용소 내에 침투시켜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포로수용소 안에서 반공포로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은 듣는 사람들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후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친공포로들이 감시병의 총기를 탈취하여, 짐을 챙겨서 모여 있는 반공포로들을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벌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는데 그중에는 기독교신자가 홀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 7 >

 

1953년 3월부터 휴전회담이 급격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정부의 휴전반대는 심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민들도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여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여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계속되었고 5월 12일에는 포로의 관리를 위한 인도군의 입국마저 거부하고 나섰다.

 

미국은 한국정부를 설득하기 위하여 한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에 관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어 휴전에 동의하기를 종용하였으나 이 대통령은 이를 거절하고 5월 30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모든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를 제안하였다. 이어서 6월 4일 공산군측은 UN군측의 최종안에 원칙적 동의를 보내왔다. 6일에는, 미국은 휴전 성립 후에 한·미방위조약을 교섭할 용의가 있다는 것과 군사·경제 원조를 계속할 것을 한국에 약속하였다. 그리고 6월 8일에는 한국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양측은 포로송환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반공포로의 송환문제에서는 한국정부의 태도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바쁘다는 핑계로 미국방문초청을 거절하고 미국에 사전 예고도 없이 6월 18일 새벽 한국포로감시원으로 하여금 27,000여명이나 되는 반공포로를 과감하게 석방하고 말았다.

 

이 대통령은 이것이 자기의 명령임을 명백히 하고 군인과 경찰로 하여금 반공포로를 보호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반공포로를 보호하라는 명령은 모든 기관의 말단까지 전달되고 민간인들에게도 전달되어 반공포로들은 무사히 강제송환을 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고향이나 연고지를 찾아 돌아가게 되었다.

 

반공포로의 석방은 이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으로 평가되었다. 동족끼리의 전쟁에서, 더구나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갔거나, 국군으로 전투하다가 공산군의 포로가 되어 인민군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UN군에게 포로가 된 처지에서 공산군측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반공포로를 그대로 방치하다는 것은 인도적인 면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 8 >

 

6.25 한국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세계에서 가장 강대국이라는 지위를 굳히게 하였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도 더욱 굳어지게 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적 지위도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한민족에게는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재해를 안겨 주었다. <북한 30년사>라는 연구자료에 따르면 한국군은 전사 147,000여 명, 부상 709,000여 명, 실종 131,000여 명을 합하여 전체 손실이 987,000여 명에 이르며, 민간인의 피해는 피학살자 128,936명 사망자 244,633명, 부상자 229,625명, 의용군 강제 입대자 400,000여 명, 경찰관 손실 16,816명 등을 합하여 1,020,010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군은 520,000여 명이 사망하고, 406,000여 명이 부상하였으며, 민간인 손실은 2,000,000여 명으로 도합 2,926,000여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여기서 남한의 1,020,010명과 북한의 2,926,000명을 합하면 무려 3,946,000명이나 되며, 일본의 <통일조선신문>에 따른 자료를 종합하여 계산하면 남북한을 합친 인적 손실은 무려 5,200,000명 선으로 파악되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비전투요원의 인적 손실이 세계 전쟁사를 통하여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이며 이것은 6·25사변이 얼마나 비참한 전쟁이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당시 초대 UN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1951년의 의회청문회에서 '평생을 전쟁 속에서 살아온 본관으로서는 그처럼 비참한 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고 무수한 시체를 보았을 때 구토를 참을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대략 10,000,000명으로 추산되는 이산가족의 발생이었다.

 

 

< 9 >

 

압록강은 백두산의 최고봉이라고 알려진 병사봉(兵使峰)의 남동쪽 약 8km 지점에서 발원하여 보촌보와 혜산진 중강진을 지나 만포에 이르고 다시 신의주를 거쳐 용암포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강의 길이는 790km나 되고 선박이 다닐 수 있는 거리도 698km나 되므로 풍부한 강물은 농공업에 쓰일 뿐만 아니라 수상교통에도 크게 이바지된다. 압록강은 양쪽 기슭에서 많은 하천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나라의 고대국가가 형성되고 발전한 터전이었다.

 

대수가 하룻밤과 또 한나절을 열차에서 견딘 피로를 풀기 위하여 찾은 곳은 압록강 기슭이었다. 인구 200,000명에 조선족 동포가 10,000명쯤 살고 있는 아담한 도시, 지안은 북한의 만포와 마주 바라보는 자리에 있고 중국의 압록강 유람선 선착장은 만포에서 1km 쯤 떨어진 하류에 자리잡고 있었다.

 

선착장의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섬은 북한의 농민들이 경작한다고 하며 바로 건너편에는 북한의 마을이 보이고 강기슭으로 뻗은 도로에는 인민학교 어린이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어른들과 만포쪽으로 걸어가고 사람이 탄 트럭이 그 반대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수 일행은 네 척의 모터보트에 나누어 타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북한쪽 기슭에 가까이 가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반가운 뜻을 전하였다. 한두 사람의 어른이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어린이들은 돌팔매질을 하면서 욕설을 퍼붓는 시늉을 보였다.

 

북한 어린이들의 행동은 우발적이고 단순한 행동일까. 아니면 철저한 교육을 받아서 길러진 적개심과 증오심의 표현일까. 대수가 어렸을 때 열차가 지나가면 돌팔매질을 하거나 쑥떡을 주던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유람선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일으킨 단순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손을 흔들며 반갑다고 소리치는 젊은이들은 누구이며 돌팔매질로 대꾸하는 어린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젊은이들은 서울에서 비행기로서해를 건너서 깊숙한 중국의 영토를 밟으며 찾아온 남한의 동포요, 어린이들은 산 좋고 물 맑은 압록강 기슭에서 자라나고 있는 북한의 동포다.

 

남한에 살거나 북한에 살거나 다 같은 혈통과 언어와 풍속과 역사를 가지고 살다가 원하지 않는 국토의 분단으로 발길이 끊기고 이념의 갈등으로 대화가 끊겼을망정 서로 미워하고 욕하고 돌팔매질을 할 필요는 없다고 대수는 생각하였다.

 

세계2차대전의 패배로 분단되었던 독일 국민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일함으로써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는데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목숨이 희생되고 얼마나 더 많은 물질이 파괴되어야 독일의 지혜를 본받게 될까.

 

1955년 이후로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라는 말은 한반도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슬로건이며 냉전시대의 갈등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대수는 두 수의 칠언절구를 지어 한글로 풀어 보았다.

 

남북한이 본디 한 고장인데

어이해 길이 막혀 바라볼 뿐이런가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에 묻노니*

그 언제 웃으면서 아픔을 달랠런가.

 

국토가 나뉜 지 50년인데

흩어진 가족은 가련도 하다

부모들의 피눈물 형제들의 울부짖음

무정한 세월만 물결처럼 흐르네.

 

중국의 지안에서 바라보이는 북한 땅에는 산이 많았고 화전이 많이 보였다. 비탈진 밭에는 옥수수나 감자나 채소들이 가꾸어지고 있겠지만 육안으로는 전혀 식별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니 화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보였다. 풀을 뽑거나 거름을 주거나 수확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리도 가파른 땅을 경작하고 있을까. 절대농지가 부족한 탓일까. 아니면 국경을 경비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일까.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농사나 잘 되어 굶주리는 동포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압록강 기슭에는 화전도 많아

북한 동포 일어서서 하늘을 부르네.

비바람 순조로워 풍년이 들어

어른이나 아이나 배불리 먹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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