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일상으로의 복귀 1
< 1 >
수술한지 두 달 반쯤(퇴원한지 한 달 반)되었습니다. 아픈 후부터는 새벽운동을 하지 않고 오전 오후(식후) 두 차례 각각 1시간 정도 운동을 하는데 주로 앝트막한 동네 뒷산에 오릅니다. 4월 들어서부터 기력이 많이 나아졌음을 느낍니다. 약간 높은 곳에서 산과 호수(상사호)를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운동하면서 바라본 동네 앞 전경, 길가에 벚꽃이 피어있습니다.
소나무 전정 작업을 했습니다. 작은 의자 위를 올라도 몸이 약간 휘청거린듯 하지만 크게 무리하지 않으면서 정원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오래 일을 해도 집사람이 “무리하면 또 병원에 가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 2 >
말을 적게 하는 방법
며칠 전, 옛 직장시절 동료 두 명이 집에 위문을 왔습니다. 그들이 가고 나서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쑥스러웠습니다. 마치 상사가 직원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장황하게 얘기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나의 입원과 수술관련 얘기들을 진지하게 들어 주었지만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얘기가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말을 적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되도록 앞서 입을 열지 말고 상대방이 말하도록 배려한 후, 나의 이야기는 최대한 짧게 말한다. 묻는 말에만 답하는 방법도 좋다.
다음으로,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지럽더라도 절대로 상대방의 말을 성급하게 가로채지 않고 다 듣고 나서 말한다.
흰 머리에 조용히 다문 입, 이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22.4.5)
< 3 >
친구 박형하로부터 온 편지(카톡, 2022.4.28)
어제는 광교산에 다녀왔습니다. 일주 전에 보았던 연두색 새풀옷들이 비온 뒤의 어제는 녹색으로 갈아 입었더군요. 자연이 연두에서 녹색으로 변하듯이 친구의 몸도 싱그런 새풀옷처럼 변하기를 빌었습니다.
친구가 먹는 음식들은 맛이 있는지? 수면은 잘 취하는지? 배변활동은 일정한지? 튀밥은 지금도 먹고 싶은지? 밤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화창한 봄꽃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나는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수단은 "오늘도 건강을 기원합니다" 라는 문장이 전부입니다.
내 친구 박형하 / 고교시절
총명한 얼굴에 순수함이 깃들어 있다.
< 답장 >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있는 편인데 기력이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꽃을 보면 아름답고 전원생활이 좋은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잠자기 전에는 별다른 생각없이 자고, 책은 손에서 놓아버렸고, 그냥 멍때리고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대선이후 티비를 보다가 잘 꺼버리는 신경증이 있고, 드라마는 주말 사극 '이방원'을 보고 있습니다. 클래식음악(유투브에서 다운 받은 동영상을 티비 화면으로 감상)을 하루에 한 번씩은 듣습니다.
아프기 전에는 어떻게 하면 '의미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덜 고통받고 웰다잉할까'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친구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에 깊은 우정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다실방 창문으로 본 퐁경(2022. 4.28)
< 4 >
혼자 걷는 산책길
마을 뒷산에는 임도(林道)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차(車)도, 사람도 다니지 않는 길입니다. 한적한 산길을 걷다가 들꽃을 보면 잠시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폰에 담기도 합니다. 가끔 들리는 청아한 새소리에 귀를 맑게 씻고 서늘한 바람이 불 때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폅니다.
길을 가다가 높은 바위 위를 쳐다보니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었습니다. 연약한 나무의 뿌리가 어떻게 그토록 단단한 바위를 가르며 살아왔는지, 사람도 저 나무처럼 강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힘차게 솟구친 나무들은 숲의 밀도를 높이면서 그늘과 정적(靜寂)을 만들고 그 공간을 산소로 가득 채우고 있는 듯 합니다. 사람은 늙으면 병들고 쇠약해 지는데 저 나무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우람하게 변하고 더 튼튼해지는 것이니 자연의 경이로움과 위대함에 새삼 숙연해집니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 콧가에 향기가 스치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핍니다. 아카시아 꽃향기였습니다. 코로 숨을 크게 쉬며 더 많은 향기를 흡입하고 싶지만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무한정으로 사람을 배려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았고 한순간 코끝을 스친 그 야릇한 향기에 아쉬움이 더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시간 속에 한정된 인생길’을 걸으며 나의 투병을 걱정해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분들의 따뜻한 위로가 있어 혼자 걷는 산책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2022.4.29)
< 5 >
오월의 장미
수술한지 4개월이 다 돼 가고 별 탈 없이 회복되고 있지만 아직은 기력이 완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의사 말에 의하면 빠르면 6개월, 1년 정도 지나면 예전의 80% 정도 기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친한 친구 둘이서 머지않아 술자리를 가질 예정인데 셋이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저는 “내가 어쩌다 술도 못 마시게 되었을까. 슬프네!”라고 답했습니다.
항상 호방하게 술 마셨던 그 시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섭섭한 마음으로 오월의 장미 옆에 서 보았습니다. (2022.5.16)
오월에 핀 우리 집 장미는
풍성하고 아름답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몇 개의 꽃송이가 하나로 뭉쳐져
큰 꽃봉오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올해 무척이나 풍성하게 핀 장미를 보니
건강 등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오월의 장미는 밝고 풍성하고 싱싱하고 아름답습니다.
희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제 병환을 걱정해 주신 고마운 분들께
장미꽃과 함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2022.5.25)
< 6 >
치유
오늘 산책길에서 큰 나무의 가지가 찢겨나간 자리에 두툼하고 동그란 표피가 새로 생긴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현상은 나무가 상처 난 곳을 스스로 보호하는 것으로,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나무의 치유능력을 볼 수 있는 한 단면입니다.
지난날에는 이런 모습들을 보고도 그냥 스쳐버렸지만 내가 큰 수술을 하고 회복 중에 있어 그런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단하게 둘러싼 표피를 보면서 사람도 저렇게 상처가 치유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에는 늘 삶에 대한 암시(暗示)가 있습니다.
(2022.5.19)
숲길을 걷다보면 이런 환상적인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큰 소나무를 기둥 삼아 휘감은 꽃들의 향연입니다
산길을 걸으면서 들꽃이 피어있나 살펴보지만 여름의 초입이어서 들꽃들이 모두 지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런데 숲을 들여다보니 꽃 말고도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짙어가는 녹색의 숲에 아직 연두색을 간직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 것입니다. 초록동색(草綠同色)이 아니었습니다. 그 연한 연두빛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비록 숨 막히는 절정의 순간은 아니지만 조용히 서 있는 연초록 나무 한 그루가 아름답습니다.(2022.5.26)
< 7 >
수술한지 4개월이 지났습니다. 매일 산책길을 걸으며 운동을 하고 있지만 마음대로 빨리 원기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몸의 기운이 나아지다가도 어떤 날은 푹 꺼지기도 합니다.
수술을 하고 난 후부터는 목소리가 밖으로 세게 잘 나올질 않고 허리도 꾸부정해지고 걸음걸이도 미세하게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아마 큰 수술을 받고 나서 힘겨운 경험이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계속 몸이 아픈 상태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 목에 힘을 주며 외칩니다.
“나는 환자가 아니다!”
(2022.6.1)
< 8 >
보고 싶다는 말
김순영 님_서울 송파구
사랑의 무게를
저울에 재어볼 수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보다
보고 싶다는 말에 담긴
사랑의 무게가 더 크리라
사랑한다는 말이
입술에서 나온다면
보고 싶다는 말은
가슴 깊은 동굴에서 나오는 말이리라
울림이 너무 커서
다시 돌아와 내 가슴에 꽂히면
너무 아파서
피멍이 드는 말이
보고 싶다는 말이리라
< 독자 감상 >
‘보고 싶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현재 곁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별이든 헤어졌든 만날 수 없는 상황이고 이는 곧 ‘부재(不在)의 사랑’입니다.
떠난 사람, 영원이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하는 마음, 이런 마음을 ‘너무 아파서 피멍이 드는’것이라 했습니다. 피멍, 피눈물 이런 단어들을 실감해 본 적이 있나요?
유행가 가사에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떠난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사랑한다는 화려한 말의 수사(修辭, 레토릭)보다도 훨씬 무게감이 있고 진지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사람인지 자명합니다. 이제는 흰머리에 잔주름이 잡히고 몸이 더 야위어진 집사람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나 때문에 저렇게 변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측은해 집니다. 병간호에 성심을 다하고 있는 집사람을 위해서라도 나의 건강을 잘 지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2022.6.7)
집사람이 앵두를 따고 있습니다.
사진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옆모습만 찍으라고 했습니다.
(20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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