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들어 가는 시간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는 늘 술을 마셨다. 취하지 않고는 그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없었다. 빈 맥주캔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아까 했던 말 같지도 않은 말, 어설프게 누군가를 가르치려 했던 태도,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쓴 글을 고치고 지적했던 모습이 줄줄이 복기되었다. 나는 선생이 아닌데, 왜 선생질을 하고 있나? 수업한 날은 잠들기 직전까지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했다.
되돌아보면 그때는 '나는 글쓰기를 가르칠 자격 없는 사람' 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게 싫었다. 아니, 내가 뭐라고 수업을 해. 뭐 잘났다고 앞에 나서서 글 쓰는 방법에 대해 중얼거리고 있어. 너나 잘 써, 너도 못 쓰잖아.'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글쓰기 혹은 문학에 대해 고상한 식견과 흔들리지 않는 철학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길 바랐다.
힘주어 강의 준비를 하면서도 혹시 내 안에 있는 부족함과 어설픔이 탄로 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어렸을 때 봐왔던 선생님의 모습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뭐든 준비된, 그 어떤 질문과 의문에도 확실하게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어론,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이런 내가 수업이라는 걸 해도 되는가. 내 수업에 실망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걱정됐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는 글쓰기 수업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하기로 한 수업이니 도망칠 순 없었다. 내가 뭘 깨달았든 깨닫지 않았든 하기로 한 일은 마무리해야 한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실한 노동자니까. 그런데, 내게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발견을 하고 나니 수업이 다르게 다가왔다. ‘나는 아무것도 없음’을 자각하고 나니 하고 싶은 말이 생기기 시작한 거다. 글 쓰면서 겪었던 좌절, 실패, 스스로 쓴 글이 꼴 보기 싫어서 애타던 기억, 내 글을 읽은 누군가에게 받은 호된 피드백 또는 가뭄에 콩 나듯 들은 칭찬...... 그런 것들을 털어놓았을 때 수강생들의 얼굴에 비치던 어리둥절함을 기억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닌데'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지.…. 하지만 계속 떠들었다.
그리고 질문에 대답하기보다 먼저 질문했다. “왜 글을 쓰고 싶으세요?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 어떤 글을 읽을 때 기분이 좋으세요?" 질문은 학생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학생들은 대답도 잘했다. 그렇게 이제껏 몰랐던 사람들과 글에 대해 대화 나누는 동안 알게 되었다. 아, 나는 그동안 수업에서 일방적으로 설교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내 안에 있지도 않은 무언가가 탈탈 털리는 기분이 들었던 거구나.
글쓰기 수업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안고 있다. 과연 도움이 되는 시간인지, 글쓰기에 물음표를 품은 사람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안겨 줄 기회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 것은, 서로가 가진 의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풀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글쓰기를 위해 시간과 노력과 돈을 쓰는 괴짜 같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주는 묘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독지가 되어 각자의 글을 마음으로 읽고, 성심성의껏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이 주는 울컥함 같은 게 분명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건 '나는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 사람' 이라는 강박을 버리고 나서야 경험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글쓰기 수업은 내가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퍼부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내가 같이 만들어 가는 시간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얼마 전, 또 하나의 글쓰기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이 수업을 통해 무언가를 얻은 것은 수강생들이 아닌 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맞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다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무언가를 배울 자격은 있다. 그 풋콩 같은 마음으로 이다음에 찾아올 글쓰기 수업을 기대해 봐야지. 이제껏 글로 만난 인연들이 새롭게 써 나갈 글을 응원하면서.
김신희 / ‘심심과 열심’중에서
* 위 글 제목 ‘함께 만들어 가는 시간’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요즘의 금언
꽤 오래전에 아침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텔런트 김애경씨의 집이 소개된 걸 본 적이 있다. 집 인테리어가 어땠고, 어떤 느낌의 가구가 놓여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집안 구석구석 붙어 있던 메모들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을 종이에 적어서 거울이나 화장대, 냉장고에 붙여 두었는데, 그걸 수시로 들여다보고 마음을 다잡는다며 쑥스러워했다. 메모는 이런 식이었다.
• 울지 마, 뭘 잘했다고 울어.
• 꽃처럼 아름다운 생각만 하기.
• 힘든 때일수록 좋은 생각만 해, 이년아.
직설적인 그 메모에 참 독특한 사람 같아 웃고 말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성실함을 곱씹게 됐다. 방송을 통해 비춰진 활달한 모습에 노년을 앞두고도 여유롭게 지낼 줄로만 알았는데, 달성하고 싶은 삶의 방식을 위해 금언을 만들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니, 꼬깃꼬깃한 종이에 손으로 꾹꾹 눌러 쓴 메모를 보면서 그가 보내 온 세월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도 그런 메모를 발견하곤 한다. 어떤 친구는 포스트잇에 '너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써서 화장대에 붙여 놓았고, 또 다른 친구는 'Love yourself'라고 새겨진 메모판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걸 볼 때마다 요즘 이 친구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 있구나, 마음이 이렇구나. 짐작하게 됐다. 그의 주변에 있는 메모는 그라는 사람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자기를 대하는 모습 그대로 남을 대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충고와 비판만 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모진 사람이에요.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남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어요.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이해하지 못하지요. 김신회 씨가 직접 자신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요? 김신회 씨를 제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요."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동안 내가 나에게 들려준 말들은 무엇이었는지 곱씹게 됐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랜 시간 동안 책상 앞 메모에는 ‘……해야 한다'라고 쓰여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그걸 달성하는 일상만이 가치 있다는 생각에 나를 닦달하는 말들만 써 뒀다.
그게 아니면 ‘…… 하지 말자’라고 쓰여 있었다. 화내지 말자, 짜증 내지 말자, 후회하지 말자 등 내가 해 온 대부분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그러지 말지 그랬어.'라고 말하는 내가 있었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해 온 것처럼 남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해 왔다.
그랬던 메모가 어느새 조금 바뀌어 있다는 걸 깨단고 나니 마음이 스윽 누그러진다.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시간을 가져도 된다고 허락하고 있는 걸까, 어느새 나는 나를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걸까.
오늘은 몇 달째 붙어 있던 메모를 떼었다. 새로운 금언을 써 보고 싶어서,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적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자.’ 마치 마음에 새긴 타투처럼 당분간 이 말을 쳐다보고 되새기고 기억하며 지내 볼 거다. 그러는 동안 내 진심을 내가 먼저 헤아릴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더 나아가 내 목소리 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면 좋겠다.
김신희 / ‘심심과 열심’중에서
넌 작가가 될 거야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 반대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후자다. 학창시절만 생각하면 한숨부터 난다. 더는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질이 대폭 상승했다.
학교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는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치게 된다. 계급의 제일 꼭대기부터 차례대로 공부 잘하는 아이, 외모가 출중한 아이, 운동을 잘하는 아이가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나 같은 아이가 있다. 공부도 별로, 운동도 별로, 빛나는 외모를 가지지도 않았고 별다른 특기라곤 없는 아이가 있다. 학년과 학교가 바뀌어도 나는, 거기 있든 없든 티 안 나는 이른바 '무명씨'였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 있기 마련이라 그만큼 외로웠다. 관심받고 싶지만 관심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아이에게 학교는 편안한 곳이 못 됐다. 친구 사귀는 일도 쉽지 않았다. 친구들 역시 매력 있는 아이를 친구로 두고 싶어 했으니까. 심지어 매력이라고는 없는 나조차 나같은 애 말고, 매력 있는 아이를 친구로 두고 싶었다.
학교는 재미없고 공부도 하기 싫었지만 결석은 하면 큰일 나는 거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저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면서 1년이 지나가기를, 이 시절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다. 나는 단지 공부를 못했을 뿐, 비행이라고는 꿈도 못 꾸는 일명 '생활 범생'이었기에 그저 출석만 열심히 했다. 그러던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작문 숙제를 내 주셨다. 으레 있는 숙제니까 그냥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 갔고, 며칠 뒤 선생님은 숙제를 검사한 후 코멘트를 달아서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나눠주셨다. 아이들에게 “잘했어.”, “수고했어."라며 짧게 칭찬하시기도 했고 과제를 책상 위에 가만히 올려 두시기도 했다. 그 담담한 태도가 마치 선생님이 건네는 성적표 같았다. 그런데 잠시 후 내 앞에 선 선생님이 내가 제출한 숙제를 내밀면서 말씀하셨다. “넌 작가가 될 거야."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쳐다봤다. 선생님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씀하셨다. “너는 글을 쓰게 될 거야. 너는 작가가 될 거야.” 그 말에 한참을 어리둥절해 있으니 주변 아이들이 하나씩 놀리는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에이, 무슨 작가예요! 초등학교 6학년이 글 쓴 거 가지고요? 야, 좋겠다? 재 좀 봐, 얼굴 빨개졌어! 다들 최선을 다해 빈정거렸다. 이제껏 주목받은 적이라고는 없던 나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오로지 벌게진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그날 집으로 오는 길, 내가 그렇게까지 발랄하게 걸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발걸음이 자꾸 튀어 오르며 어깨까지 위아래로 둥실댔다.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내가 작가가 된다고? 내가 글을 쓸 줄 아는 건가? 엄마한테 자랑도 했던 것 같다. 그날의 격한 감동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밤에는 일기도 썼다. '선생님이 나보고 작가가 될 거라고 했다. 거짓말인 것 같은데 기분이 좋다. 나는 정말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그날 이후 작가가 되겠다는 꿈 하나만 바라보고 매일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꼬박꼬박 글을 썼다면 참 좋았겠지만 전혀 아니었고, 선생님 말씀은 일기장 한구석에만 남은 채 나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됐다. 다만 글 쓸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상하게 두렵지가 않았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자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글쓰기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왜 이 모양이지? 왜 이렇게 잘하는 게 하나도 없지?'라는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그래서 기분이 가라앉을 때마다 일기를 쓰고, 편지를 썼다. 지금은 뭘 적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글도 많이 끄적였다. 글쓰기만큼은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학창 시절을 통틀어 빛나는 추억이라고는 거의 없지만,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었던 그 순간만큼은 여전히 내 인생 빛나는 순간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열세 살 아이에게 너도 잘하는 게 하나는 있다고, 끝까지 그걸 하면서 살게 될 거라고 굳게 예언하셨던 선생님의 한마디가 가슴 한편에 훈장을 달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 낸 무언가에 그렇게 확신에 찬 피드백을 들려 준 사람은 그분이 처음이었다. 여전히 내가 하는 일에 의심이 들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린다.
살아온 날이 쌓여 갈수록 사람을 키우는 것은 양육자만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이만큼 키운 것이다. 누군가의 눈빛이, 마음이, 응원 또는 꾸지람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걸 조금씩 알아 간다. 그래서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칭찬이 필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칭찬하고, 지지가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손 내밀고 싶다. 무엇보다 내가 쓰는 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정순영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처럼 저는 이렇게 작가가 되어 글 쓰며 살고 있습니다.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나 자신을 좋아하는 법도 몰랐던 아이가 제 일을 사랑하고, 저를 아끼는 법을 깨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김신희 / ‘심심과 열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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