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일곱 가지 장면
이미지 출처 : SAPENET
< 굿 와이프 > 일곱 번째 시즌 열한 번째 에피소드의 첫 장면은 다음과 같다. 모두 일곱 개의 컷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딸이 태어나 처음으로 걷는 날이다. 두 번째는 벌써 조금 자란 아이가 첫 등교를 하는 날이다. 세 번째는 아이가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발표하는 날이다. 네 번째는 어느새 사춘기를 맞은 아이가 교정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장면이다. 다섯 번째는 부쩍 자란 아이가 졸업 무도회에 가려고 드레스를 차려입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다. 여섯 번째는 그녀가 첫사랑과 키스를 하는 장면이다. 일곱 번째는 이제 성인이 된 그녀가 아버지와 평화롭게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어디선가 잘못 날아온 총알에 맞아 사망한다. 여기까지 2분이 걸린다.
유물론자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죽음 이후에 뭐가가 더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이제 막 죽은 당신에게 일곱 가지 장면으로 삶을 요약해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고 해보자. 일종의 포트폴리오다. 유튜브 섬네일 이미지라고 생각해도 좋다. 대표 이미지를 일곱 개 고르는 거다.
내 인생은 그저 하찮고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서 일곱 개씩이나 되는 장면을 고를 수가 없다며 낙담하는 사람도 있고, 내 인생은 너무 화려하고 중요해서 고작 일곱 개의 장면으로는 요약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담하는 자도 화를 내는 자도 결국에는 똑같이 겸허한 마음으로 과제를 마치리라 생각한다. 적막한 삶도 소란스러운 삶도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은 똑같이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막상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작업이다. 눈을 감고 여태까지의 삶을 펼쳐본다. 내 삶의 가장 충만한 순간이 떠오른다. 또한 가장 비참한 순간이 떠오른다.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이 떠오르고, 가장 시끌벅적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가장 고마웠던 순간이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가장 억울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내가 들은 가장 기쁜 말들과 가장 아픈 말들이 뒤를 따른다. 마지막까지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 얼굴과 이름들이 있다. 미련이 남지 않게 잘 눌러서 마저 지우고 고개를 들면, 그렇게 일곱가지 장면을 모두 정한다.
나는 여태 내 삶이 농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딱히 성공적이지 못한 농담 말이다. 백 명의 관객 가운데 두 명밖에 웃기지 못한 실패한 농담. 그게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이었다. 그런데 일곱 가지 장면을 꼽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꽤 입체적이다. 이야기 속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때 적어도 애정을 가지게 되는 종류의 캐릭터 말이다. 일곱 가지 장면을 꼽는 일은 내 삶을 이야기로, 나를 캐릭터로 만든다. 그리고 그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지나가던 행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과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사실 이 과제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작업이어야 한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선별한 일곱 가지 장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과제를 나누어 다른 두 사람에게도 나와 같은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망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으면 한다. 시간을 돌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디 평안하기를.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허지웅 / ‘살고 싶다는 농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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